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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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SF의 고전의 시작은 문명의 이기 혹은 문명의 기대에서 출발한 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 SF의 대세는 인간의 이기로 인한 환경오염에 뿌리를 둔 작품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모래폭풍만 자욱한 사막.

밤하늘의 별이 사라진 대기.

늘어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인류.

방독마스크가 필수인 시대.

바다를 잃은 지구.

외계인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되어가는 지구.

하나씩 하나씩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생명체.

시뮬레이션을 통해서만 걸어 볼 수 있는 숲길.

그리고 인공 자궁.

 

그렇기에 출발은 암담하다. 자욱한 미세먼지와 어둠만이 내려앉은 폐허 속에서 갑갑함과 절망 속을 휘돈다. 자본주의의 양면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류. 바깥에서 안으로 좁혀 들어오는 이 무한의 압력 앞에서 언제까지 절망의 문고리만 잡고 있어야 할까. 그 문을 열면 진짜 사랑과 희망이 있고 그리움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는 한 걸까. 하지만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에서 보여준 절망이 은지를 암흑으로 밀어 넣고 다시 절망 앞에 세워 두었다고 결론짓고 싶지 않다. 그 문이 무엇이든 간에.

 

언젠가 나는 자꾸만 생겨나는 싱크홀을 보며 지구가 한숨을 내쉬는 거라고 말한 적 있다. 자꾸만 땅을 들쑤셔서 고통의 한숨을 내쉬는 거라고. 어슐러 작가의 책을 덮자마자 이 책의 표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난 거실 테이블에 이달에 읽을 책을 미리 꺼내 쌓아둔다) SF의 흐름을 이어가고 싶었다. 이달 북클럽 선정도서이기도 했고. 왠지 정세랑과 김초엽 작가도 떠오를 것 같고.

 

작가가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힌 <사막에서>는 무미건조한 삶 앞에 던져진 인간들이 보인다. 본다고 믿는 것을 쓰라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말을 좀 더 확장해보면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몸속의 혈류조차도 제 기능을 상실해가는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는 흐르고 흘러 각자의 운명대로 살아간다. 아버지로, 어머니로, 딸로. 각자가 짊어진 고독은 각자가 짊어진 고된 견딤과 함께 지구의 먼지 속으로 흩어진다. 그것이 무심함이 되어 부유하더라도 그렇게 부유하다 보면 언젠가 희망의 꼬리를 붙잡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회.

어느 곳이든 네가 나아가는 곳이 길이고, 길은 늘 외롭단다. -p 35

정말 고독한 건 인간일까, 지구일까, 우주일까.

 

절친의 동생 내외는 일부로 아이를 갖지 않는다. 그렇게 합의를 보고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늘 일로 바쁘자 아내는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전혀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멀고도 가까운 미래.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아니라 더는 낳을 수 없는 시대가 온다면 인류는 절박함으로 인해 그 이기심이 잔인하게 돌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를 위해서>는 두 장 분량의 단편임에도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이야기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반납해야 하는 나.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 여긴 선택권이 없었지.

 

<레시>는 그 어떤 단편보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존재의 가치에 빛을 담아준 이야기였다. 지구는 바다를 잃었고 인류는 바다를 살리기 위해 다른 행성으로 간다. 승혜는 바다 깊이 떠돌던 상실감(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몸의 균형을 차차 잃어간다. 그때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레시의 눈동자. 승혜는 인간만이 지닌 미묘한 감정 하나만으로 그것의 존재 가치가 절대 훼손되지 않길 바란다. 그 바램이 전해졌을까. 아니면 승혜가 그렇게 믿고 싶었을까.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p.88 그것은 승혜가 영원토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자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그런 바램의 바이러스가 레시라는 숙주에게 옮겨 간 것처럼.

 

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뿐>의 2탄 같았던 <어떤 물질의 사랑>은 기발하고 유쾌한 이야기 속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와 경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너는 민혁이를 사랑해서 이제 남자가 될 거야.

......허 -p.104 이 정도면 엄청난 스포이긴 한데 진짜 잼난다. 어떤 일이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웃을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우리가 되어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구에 같은 인간은 없어요. 모두가 다 서로에게 외계인인 걸, 모두가 같은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해요. -p.143

사랑. 우주를 가로지르는 사랑 따위에 맘을 둬 본 적이 없는 것 같고 그 사랑이라는 것도 충분히 해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무뎌져가지만 이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다음 생엔 꼭 우주적 사랑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ㅋ 나와 너와의 온도가 비슷하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공감하지 않음으로써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p.168 라며 공감 능력을 제거하는 수술을 권한다면 어떨까. 전쟁과 살인의 동기도 정서적 공감의 극대화로 발생했다고까지 설득한다면 혹 하게 될까. <그림자놀이>에서 두 친구는 이십 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지구와 우주)을 떨어져 지낸다. 그리고 한 친구는 이 공감 능력을 제거해 버렸다. 공감 능력이 사라져 버린 친구를 바라보던 친구는 오래전 그 친구를 잃었다고 여긴다. 지구를 떠나 우주를 떠돌다 돌아온 친구는 진짜 지구를 떠났다. 하지만 그 친구를 잃었던이라는 없애버렸던 공감이라는 감정이 어디선가 자꾸 재생되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의 손이 얹혀 있던 가슴은 그 아픔을 나눠갖기 위해서 계속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필 네가 있던 곳이 우주여서

나는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네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숨 쉬는 모든 곳이

네 아래에 있었다. -p.188

이 말 너무 슬프다.

 

단편 중 <두하나>는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를 담고 있다. 어느 날 외계 우주선이 떨어졌고 강력한 빛이 일더니 남자만 좀비 비스름하게 변한다. 여자들은 그들로부터 필사적으로 살아남아 지구를 돌려놓으려 한다는 이야기인데 지나의 동생 하나는 외계인의 음성을 분석하는 능력을 지녔으나 어느 날 실종된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지나는 하나를 찾아야 한다는 희망을 놓지 못하는데 마침 두하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를 돌봄으로써 위안을 받고 희망을 품는다. 두 하나 중 두하나가 어떤 역경을 지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역경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지나에게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희망까지도 동일화할 수 있다는 건 어쩜 다행스러운 일이다.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는 가장 우울했던 이야기였다. 환경문제가 더 피부로 와닿기도 했고. 물론 나도 약간의 기부와 쓰레기 줄이기 정도의 작은 실천으로 책임감을 덜고 있긴 하지만 읽는 내내 인간이 사라져 버린 저 어두운 구멍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저어새는 밀렵꾼의 눈을 피해 산을 넘지 않고 어둠(터널)을 뚫고 나온다고 한다. 그런 생존능력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아무튼 멸종되었던 저어새는 기이한 싱크홀 속에서 다시 나왔다. 저어새에게는 분명 보였던 출구가 인간에겐 왜 보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은지가 못 본건 무엇이었을까. 단지 희망찬 미래일까. 아마도 가면 밖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와 사고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다. 빈틈이 있어서 인간적이라는 말이 괜한 헛말이 아니다. 교통사고 치사율을 줄이기 위해 로봇을 이용해 테스트를 한다. 그 로봇 이름이 더미다. 더미가 수없이 부딪히고 깨지는 동안 인간의 사망사를 줄여준다. 단지 기계니까, 기계 따윈 부서져도 연민을 가질 필요가 없지만 이 이야기는 한발 좀 더 나아간다.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때문에 더미에게 심어진 건 배려라는 기능이다. 사랑의 감정을 심어줄 수는 없으니까.

동승자를 살리기 위해 반사적으로 기우는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 더미에게 친구를 만들어 준다. <마지막 드라이브>는 로봇이지만 인간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로봇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행복하면 인간은 어떻게 되나요?

미래를 걱정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래.

그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네요.. -p. 328

 

그 행복의 중심에 인간만 존재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 참으로 많은 것들을 희생시킨다. 반대로 인간을 위해 언제까지 많은 것들이 희생을 감당해야 할까. 로봇이잖아!라고 하기엔 이야기가 던지는 메시지가 슬프다.

 

여태 나는 피상적 슬픔과 연민만 느끼고 지냈던 건 아닐까. 작년부터 SF 소설만 읽고 나면 반성 모드로 돌입하게 되는 건지....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던 작가. 그래서 난 지구 살리기 프로젝트 작가를 한 명 더 추가하며 인사를 건넨다.

이렇게 알게 돼서 반가워요. 다음 작품을 만나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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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6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작품 기대 되네요 건빵님 리뷰 읽으면서 어떤 영화가 떠올랐는데 독일 무성영화 ㅋㅋ 폭신 폭신 곰돌이 넘귀엽 ʕ-᷅ᴥ-᷄ʔ

건빵과 별사탕 2021-02-16 15:12   좋아요 1 | URL
지인분이 요런 스퇄의 책을 몇권 추천해 주셨는데 생각보다 잼나네요. 숨겨진 메세지도 단단하고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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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를 대표하는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처럼 인간은 각자가 가진 불행의 그릇만큼 불행하다. 나에게 작은 고통이 누군가에겐 전부인 고통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베르테르에겐 사랑( to you)이 전부였고 나도 사랑(myself and)이 전부지만 그 대상이 다를 뿐이다. 베르테르가 자기 자신을 조금만 더 아꼈다면 슬픔을 정당화한 자기학대는 하지 않았을 텐데.

 

작년에 읽고 재독을 했다. 작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느낀 감정은 짜증이었다.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도 납득이 안되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인데 그럴 때마다 젊음을 허망하게 끝내서야 되겠는가.

사랑 이야기는 나의 성향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 난 아무리 봐도 베르테르의 집착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재독하기 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제목을 한참 머릿속에 띄워놓고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젊은 베르테르 자신의 슬픔(사랑)을 이해하기엔 도저히 감성보다는 이성이 앞서서 연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좌절) 전체를 이해하려고 드니 조금씩 감성의 문이 열렸다.

 

베르테르는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심경을 전한다. 그가 잠시 편지가 뜸했던 6월 초 그는 한 여인의 세상 속으로 빠진다. 약혼자까지 있는 여인이었음에도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해와 달과 별은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겠지만 나는 도무지 낮과 밤을 분간할 수가 없었네. 내 주위의 세상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던 것일세. -p.42

 

그가 <전쟁과 평화>의 아나톨 같은 성향(바람둥이-약혼자가 있는 나타샤를 완전 홀림)이었다면 가볍게 사랑을 쟁취했을는지도 모르지만 베르테르는 감성은 충만하나 소심한 스타일이었다. 정말 심수봉의 노래 '사랑밖에 난 몰라'를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남자다.

 

아나톨과 베르테르의 공통점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대담해진다는 것이었다. 아나톨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면 베르테르는 단언과 확신으로 보여준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베르테르도 한 머슴의 과감한 결단력을 부러워하거나 심지어 미치광이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의 단언과 확신은 그 수위가 점점 높아만 간다.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며 그녀가 자신과 결혼했으면 더 행복했을 거라는 마음. 2부에 가면 그러한 확신이 더 절정을 보인다. 로테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서 편지의 수신인이 나라는 상상을 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가 기르던 새가 입을 맞추자 그 작은 새의 부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내 입술로라며 행복해한다. 게다가 나중에는 알베르토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단정 짓기까지 한다.

 

이런 점들이 나를 점점 더 짜증 나게 했는데 과연 그의 행동을 사랑에 눈먼 젊은이의 순수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들이 그의 사랑이 불러온 착각일까, 행위의 진실일까 하는 문제도 정리가 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가 틀리고 알베르토가 옳다는 건 아니지만 그가 알베르토와 나누는 대화의 절반 이상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변명 같다.

 

도덕적으로만 본다면 그는 마음을 거두고 그들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물론 본인도 죄책감에 잠시 그들 곁을 떠나 있었지만 바깥에서 겉돌다 로테를 잊지 못하고 다시 오게 된다. 그렇다면 로테는 책임이 없을까. 로테는 베르테르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에게 자꾸 공간을 내어주었다. '내일도 오실 거죠?'라는 기대와 '사랑하는 베르테르'라는 문장으로 우정을 포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정쩡하게 빈틈을 내어주던 그녀조차도 베르테르의 감정이 극에 달하자 알베르토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이 상황에 부담을 느낀다. 이런 종류의 사람이 여러 사람의 감정을 아프게 하는 법이지.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된 이유로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숭배하게 되었는지 모른단 말일세! -p.57라는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녀와 자신의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끌림이 강력해질수록 자신이 비참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느낀다. 할머니의 자석산 이야기를 떠올린 데는 그런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동하는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 오래전 그는 그 속에서 느끼는 벅찬 감정에 전율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지금은 인간이 자연에게 행하는 파괴력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만큼 그는 사랑이 충만했을 때 오는 행복감보다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오는 불행에 더 집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초겨울 그의 심경은 절정에 달한다.

아, 과연 나보다 비참한 인간이 나 이전에 존재했을까. -p.137

 

사랑의 끝이 소유가 아님을 깨닫는 것까진 좋았으나 그는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죽음에 두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말았다. 그를 위해 슬퍼하고 후회할 그들을 떠올리면서 위안을 얻다니. 나는 결정적으로 그의 죽음 때문에 그가 로테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오래전 대학교 친구 중에 그 친구 때문에 자살한 남자가 있었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친구의 집 아파트 바로 앞 동에서 뛰어내렸다는 얘기를 듣고 경악을 한 적이 있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그 친구가 가졌던 트라우마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오래가지 않았을까. 특히 베르테르가 로테와 처음 만났을 때의 복장 그대로 죽으려 했을 때 소름이 돋았다.

 

로테는 과연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발걸음을 재촉해 보아도 '저곳'이라는 이상(理想)이 '이곳'의 현실이 되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은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만다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핍과 절박함 속에 머물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사라져버린 활력소를 또다시

갈망하게 되는 게 아닐까. -p.43

 

위 말을 스스로 했음에도 그는 왜 사랑만큼은 대입시키지 못한 걸까. 사랑도 인간의 반복된 갈망에 하나였음을 알았더라면 그가 내세의 믿음에 빠져 버리지 않았을 텐데. 그는 너무나 속단했고 성급했다. 세상과의 불화를 죽음으로 벗어나려 한 것! 그것을 자유라고 여긴 그 사실이! 난 그것이 슬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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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6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르테르가 발표했을 당시에 당시 10대 20대들이 소설속 베르테르처럼 옷을 입고 자살을 할정도로 ㅋㅋ 건빵님 말씀처럼‘사랑의 끝이 소유가 아님‘ 명언임 ^.^

건빵과 별사탕 2021-02-16 10:25   좋아요 1 | URL
진짜 젊은이들의 무분별한 신드롬 문화도 무서운것 같아요. 소름이 돋더라고요.으흐~~ ㅎ
 
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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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 책을 읽다 잠깐 잠이 들었다. 잠깐 잠이 든 것치곤 너무나 생생하게 악몽을 꾸었다. 순간 눈은 번쩍 떠졌고 미동도 없이 그 자세 그대로 누워 정신을 되돌리고 있었다. 그때 서서히 내 눈앞에 들어오는 나무의 표지. 쪼끔 괴기스럽네.ㅋ 나는 책을 읽다 잠이 들 때면 가끔 책 관련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니 자연스레 책 속 내용이 궁금해졌다. 결론은 꿈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면은 없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분위기는 닮아 있는 듯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의 세계로 입문하고자 <나무>부터 끊었다. 책이 출간된 그 당시에 읽었더라면 더 신선하긴 했겠다. 얼마 전 아들 녀석도 반강제로 이 책을 읽었다. 읽는 도중에 책 제목이 왜 나무냐며 아리쏭한 표정을 짓자 나는(책을 읽기 전이었으므로) 대충 모든 이야기의 뿌리는 그 근원이 있다는 의미 아닐까 하며 모호하게 대답해 줬다. 뭐 읽기 전이었으니 뭔 말을 못 할까.ㅋ

 

베르나르는 아주 상상력이 풍부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지적 탐구를 즐기는 작가인듯하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지만 작가의 의도는 명확하다. 인간의 내면과 삶을 풍자하는 데 있어 거침이 없다.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편의 풍자가 재밌다. 거대한 외계인이든 걸리버 같은 거인이든 그들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야기는 인간을 사육하는 외계인이란 설정인데 수컷이 자기 둥지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배설이고 암컷은 군것질이라니. 우리 집도 그런가? 앗! 남편아~~.ㅋㅋ

 

인간은 장점도 어마 무시한 생명체이지만 단점 또한 어마 무시한 존재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워낙에 복잡 미묘해서 인간을 쉽게 정의 내리기도 어렵다. 한없이 위대하다가도 한없이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게 또 인간이기에 인간의 어두운 면을 꼬집는 이야기에는 그 끝이 없어 보인다. 이곳에도 여러 인간 유형이 등장한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어디까지나 해석은 독자의 몫이고 각 단편의 귀퉁이에 메모하듯 몇 자 끄적여 보련다.

 

첫 번째 단편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은 이미 제목에서 의도가 보인다. 기계 인간이 기계들을 탓하던 나름의 반전이 있던 이야기였는데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가 바로 떠올랐던 이야기였다.

"살아움직이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에게 진정 영혼이 있는가."

 

<바캉스>편에서는 과거 여행이 자유로운 지구 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닌 어느 미래다. 한 남자는 현재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거를 동경한다.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의 교훈이 살짝 스쳤는데 이 이야기는 더 직설적이다. 1600년대의 파리는 그야말로 우리가 동경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과거에 갇혀 위기를 맞은 남자는 그제서야 후회를 한다. 살다 보면 옛날이 좋았어라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다. 왜 현재 삶을 부정하고 과거만 동경하는가. 부디 현재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를.

<다시, 올리브> 속 한 문장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 어떤 시기를 지나는 중이지.

 

<투명 피부>는 우째 상상하기엔 조금 소름이 돋고 거부감이 든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이성이 앞설 수 있을까.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고 위가 음식물을 부수고 장에 배설물이 쌓여가는 모든 과정을 본다는 것 자체보다 그 시뻘건 색감이 더 싫다. 알록달록 컬러풀하다면 모를까. 피부가 투명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ㅎ

그렇듯 진정한 두려움은 실체를 마주하기 전이 아닐까. 오히려 그 변화를 마주하면 대담해지는 것도 또 인간이니까. 그 대담함을 받아들인 것이 한국인이라니.ㅎ

 

<냄새>편은 그냥 인간이 위대해 보인다. 작가의 의도와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말 인간은 창조의 동물이다. 위기에 강하고 어떻게든 헤쳐나간다. 어떤 시련이 와도, 어떤 똥 덩어리가 떨어져도!

 

<황혼의 반란>은 많이 씁쓸하다. 어느 광고가 떠오른다. 인간의 수명이 백오십이 될 거라는. 그 라디오 광고를 들을 때마다 뜨아~~ 그건 아니지라며 설레발을 쳤었다.

수명연장 기술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나. 세대 간 격차를 해소하기엔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르고 사회적 시스템 구축만이 살길인데! 당장에 늙음이 현실이 아니라고 해서 미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회구성원의 톱니바퀴로써 각자의 존재와 역할이 있기에 노년의 삶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보장돼야 한다. 세금으로만 충당하려 들지 말고 나라 경제력을 키워야 할 텐데.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

 

 

 

손이 자율성을 갖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정신 하나도 제어하기 힘든데 손까지 말썽을 부린다면 진짜 피곤하긴 하겠다. <조종>편은 한 형사가 자신의 왼손을 제어하지 못해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결국 왼손을 으르고 달래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는데.

내 적을 사랑하라?는 조금 과장된 말일 것이고 적을 포용할 수 있게끔 나의 능력을 키우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 적이 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도록 구워삶아야 하지 않을까. 왼손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건 아량뿐이다.

 

인간관계의 네트워크를 나무의 무수한 가지에 빗댄 <가능성의 나무>는 나무의 생과 사를 통해 인간 역사의 순환을 찾는다. 상상은 인류의 미래를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상상은 언제나 긍정의 가능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늘 상호보완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가지가 툭 부러졌던 순간을 무수히 지나면서도 다시 가지를 뻗어내었던 역사를 반복해 왔다. 그런 장점을 기반으로 더 나은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인간은 원래 한계를 모르는 존재임에도 반면 그 한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어리석은 면도 존재한다. 그리하여 한계를 벗어나는 일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 한계는 한끝의 차이일 뿐이다. 17과 18, 18과 19처럼. <수의 신비>는 이런 점을 역설한다. 가장 무서운 건 무지다. 그 무지보다 더 무서운 건 지식 안에 갇히는 것이다.

 

<완전한 은둔자>도 조금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단편이 <투명 피부>보다 더 소름이 돋았다. 우리의 삶은 육체 안에서 더 의미가 있고 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무슨 내세의 삶도 아니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취급 주의: 부서지기 쉬움>야말로 어리석은 어른의 표본이다. 이 이야기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아이에게 우주를 만들라니. 그 나이에 맞는, 아이가 원하는 선물을 하자. 아이야말로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아닌가.

 

<달착지근한 전체주의>는 우리가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다른 단편보다 내용이 길었는데 어느 시대나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았나 싶다. 흥미의 맛에 길들여진 대중을 주무르는 자들. 그들의 입맛대로 움직여주는 대중. 이 기가 막힌 찰떡궁합에 속아있는 동안 시대는 진실을 놓쳐버린다. 훗 대나 되어서야 깨닫게 되는 사실들. 어쩌면 이것 또한 역사의 쓰디쓴 악순환이 아닐까.

 

<그 주인에 그 사자>편은 사자를 애완동물로 기르면서 벌어질 수 있는 사회현상들을 보면서 앞뒤 계산 없이 유행만을 좇는 인간을 비꼬고 있다. 뭐 전갈이 그 자리를 대신하듯 유행이라는 건 유통기한이 심하게 짧긴 하지만 사자로 인한 리스크를 떠올린다면 그런 무분별한 유행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말 없는 친구>는 화자가 나무다. 살인 사건의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본 나무는 말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실제 나무는 전쟁통엔 성장을 멈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식물도 생명체임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어느 신들의 학교>편은 글쎄다. 신들끼리 인간 세상의 부분을 관리한다는 이야기인데 신들끼리 잘 좀 협력해서 종교전쟁만은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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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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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슐러K르귄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방탄소년단 때문이었다. 그들의 뮤직비디오 <봄날>을 유심히 보면 오멜라스라는 간판이 짧게 지난다. 지금도 오멜라스를 검색하면 이 뮤직비디오와 연관된 컨텐츠가 제일 상위에 노출된다. 그만큼 노래의 성공은 잘 모르던 SF 작가의 책을 나의 서가에 꽂아놓게 한 셈이다. 오멜라스는 그녀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속 가상도시다. 당시 단편을 그리 즐겨 읽지 않던 나는 단편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에 충격을 받았고 그 뒤 작가의 에세이집도 망설임 없이 들였었다. 하지만 소설을 주로 읽다 보면 에세이집이 자꾸 밀린다. 결론은 아쉽게도 에세이집을 건너 뛰고 그녀의 산문집을 먼저 읽게 되었다.

 

책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이 책은 내게 위험했다. 그녀와 함께한 삼 일 동안 내 지갑이 무진장 털렸다. 작가의 산문집. 특히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녀의 서평과 서문을 메뉴로 하고 있는 책이라면 어떤 독자든 털리지 않고는 못 베길 것이다. 행복한 비명이지 않냐고? 확실한 건 당분간은 손가락에 붕대를 감아둬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비록 지름신이 강림해 힘들긴 했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너무나 즐거웠다. 몰랐던 작가를 향한 궁금증은 당연하거니와 알고 있는 작가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그간 내가 막연히 SF라는 장르에 가지고 있던 편협함까지 깨부술 수 있어 유익했다.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 풍성하게 만들어요. -p.192

SF는 그 상상의 세계에서 닫혀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판타지는 어린이 문학이 아니다. 더더욱 상업성에 휘둘려 가벼이 치부되고 소비되고 말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 그 진중한 세계에 발도 들여놓지 않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생각을 접어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가공의 세계에서 만난 낯선 언어를 다시 배우고 동물과 언어로 교감하고 무한한 초능력과 마법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더 강력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저자가 말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정신적 재현"을 통해 우리의 정신을 깨울 수 있다. 꿈의 어둠이 아닌 상상의 빛 속에서.

 

 

 

 

저는 엄지손가락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력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p.22

 

1장에서는 다양한 분야에 관한 저자의 에세이를 만날 수 있다. 나처럼 작가의 글을 접하기 전이라면 저자의 매력에 푹 빠질는지도 모르겠다. 기업 출판사와 서점 체인의 몹쓸 구조와 행태 그리고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문학계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 외 장르문학에 대한 견해, 시, 언어, 자연, 책의 운명, 상상 등을 통해 문학이 삶에 끼치는 영향과 가치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저자는 열일곱 살에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 아주 색다르고 극적인 세상을 발견한다. '완전히 다른 어딘가'로 실려가는 설렘을 느꼈다고 하는데 역시 작가는 떡잎부터 다른가 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작가는 글을 잘 써야 한다. 의도적 글쓰기가 아닌 이야기를 쓰는 것. 쓰면서 작가 스스로도 진실을 발견하고 독자 또한 또 다른 진실을 찾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잘 쓰인 글이라는 의견에 이견은 없다. 저자는 그 의견에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을 더한다. 저자에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일깨워 준 건 어린 시절의 집이었다. 빛과 공기가 내려앉던 레드우드 계단. 기막힌 풍경을 바라보며 하는 설거지. 실내 가득한 레드우드 향.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 숨 쉬는 그런 집에서라면 아름다움에 관한 감각이 그 어떤 이들보다 더 열려 있을 것이다. 글 속에는 그런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맛을 찾아낼 독자들을 위해서.

 

요즘 나는 아이들과 매번 충돌한다. 이유는 바로 휴대폰 때문이다. 손끝이 주는 유희에 빠진 아이들은 이미 책을 잊은지 오래다. 책을 읽는 집이라면 아이들도 자연스레 읽을 것이라는 말은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나온 말인 것 같다. 아무리 기다려도 휴대폰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저자는 종이책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말하고 있어 위안이 된다. 전기도 필요 없고 기술의 진보도 필요 없는 종이책이 주는 위안. 여기에 이 책의 제목이 등장한다.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p.183

 

 

 

 

저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 덕분에 자신만의 길을 탄탄히 다져왔다. 그 믿음의 증거인 그녀의 책 서문과 서평들은 내게 보석처럼 다가왔다. 2장과 3장을 읽으면서 좋은 서평의 틀이 보였고 앞으로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게 좋을지 고민하게 된다.

 

책의 서문에 실린 글들 중 강한 흥미를 끄는 작품들도 여럿 있었으나 책을 구할 수 없거나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도 더러 있어 아쉬웠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는 정말 읽고 싶은데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ㅜ.ㅜ 생각하는, 살아있는 행성이라니.

그래도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헉슬리의 작품에 관한 견해도 흥미로웠다. 경고성 소설이 갖고 있는 미래 예언을 헉슬리는 '믿음'으로 증명했기에 지금까지도 읽히는 것이다. 불안한 20세기를 대변한 작품임에도 이 불안이 걷히지 않는 한 계속 읽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아이들 방에 있는 어린이 고전 전집에 판타지 문학이 제법 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조지 맥도널드의 <공주와 고블린>뿐만 아니라 읽지 못한 책이 많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좋은 묘수를 찾아봐야겠다.

 

 

 

 

꼭 읽어야 할 책이자 저자가 사랑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한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재작년 북 카페 회원들과 함께 읽으려다 포기한 적이 있었는데 아쉬움이 밀려온다. 이렇게라도 다시 언급이 되니 이번엔 꼭 읽어야겠다.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언급한 주제 사라마구의 <동굴>을 읽을 때쯤 때마침 이 책을 읽는 중이라는 북모임 이웃 덕에 더욱 관심도가 상승한다. 저자도 사라마구 편에서 유독 많은 이야기를 쏟고 있다. 어두운 작품세계 안에 깃든 묵직한 풍자와 현란한 글 솜씨에 깃든 재치들을 엿보고 싶다. H.G. 웰스의 작품들은 제목(타임머신, 투명 인간, 우주전쟁, 달의 첫 방문자)부터가 SF의 시작을 여는 것들이다. 웰스의 세계에서 본 그는 순수한 과학자인듯하면서도 창작욕이 불타는 작가인듯하다. 그의 단편 몇 편은 꼭 만나보고 싶다.

 

저자의 고민과 확신은 명확해서 신뢰가 간다. 서평에 대한 부담은 곧 작가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저자의 서평들은 충분히 예를 갖추고 있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지 않다. 독자를 충분히 배려한 글솜씨가 맘에 든다.

 

3장에서는 아는 작가도, 읽은 작품도 제법 있어 글이 더 잘 들어온다. 켄트 하루프, 토베 얀손, 얀 마텔, 살만 루슈디, 주제 사라마구의 서평을 꼼꼼히 읽으면서 기억을 되살렸다. 켄트 하루프의 글은 진실되게 읽힌다는 말과 토베 얀손의 작품에서 느낀 묘사(서두르지 않고 적확하며 선명)에 관한 표현도 백번 공감한다. 얀 마텔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읽었을 때의 그 기이함이란. 내겐 정말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남아 있는데 저자의 마지막 문장을 더해본다. 떨쳐 낼 수 없는 다정함.

살만 루슈디의 <2년 8개월 28일 밤>은 얼마 전에 읽은 책이다. 저자는 결말에 대해 다소 실망스러운 의견을 보인다. 하지만 빛이 어둠을 이길 더 나은 방안이 있을까. 실상은 그러지 못할지언정 소설만이라도 희망적이어야 하니까. 마거릿 애트우드의 신작이었던 <도덕적 혼란>을 들일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마지막 문장에서 유혹을 떨치지 못하겠다. 정말이지, 애트우드 같은 작가는 없다.

 

상상은 손끝과 그 손끝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저자는 여자들만 모여있는 칩거처인 헤지브룩에서 노트북이 아닌 종이 노트에 한자 한자 쓰는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눈앞에서 토끼가 뛰어가고 도마뱀이 등장하는 곳이라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피터 래빗 이상의 상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주제 사라마구와 이탈리 칼비노의 작품 또한 줄줄이 들여놓고 나니 든든하다. 올 하반기는 SF의 세계에 푹 빠져보련다. 그리고 나는 책의 운명을 이어 줄 소수의 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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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0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건빵님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는 영화도 있어요. 지갑터는 책을 써준 르귄 여사 에게 파스테르나크는 작가의 길을 가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지바고로 유명하지만 원래 파스테르나크는 시를 썼고 그 시를 산문으로 써낸게 지바고 ^.^

건빵과 별사탕 2021-02-10 10:48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아쉬운대로 영화라도 찾아봐야겠어요.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정보도 더 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시, 올리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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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서 이번만큼은 미용실을 가겠다던 다짐을 또 접고서 집에서 염색을 했다. 할 때는 귀찮아도 머리를 말린 뒤 거울을 보면 돈을 아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거짓말 많이 보태서 십 년은 젊어진 기분도 들고. 그런데 오늘 아침은 올리브 여사때문에 다른 기분을 느꼈다. 십 년 뒤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겠지라는.

 

<다시, 올리브>는 전작 <올리브 키터리지>의 삶을 잇고 있다. 물론 나는 저자의 책이 처음이다. 전작을 건너뛰고 너무나 늙어버린 올리브를 먼저 만난 셈인데 그녀의 이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 책은 올리브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여러 이웃들의 삶을 단편으로 엮어 놓았다. 삶의 다양성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무시하고 머물고 지나가고 놀라면서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 따윈 없음을 깨닫게 된다. 삶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P.455 그 모든 건 그들만의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다. 삶의 접점을 찾는 것도 무의미하다. 옳고 그름의 잣대보다 행복과 불행의 결과보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의 삶에서 내 삶의 나아갈 방향을 찾는 것이다. 더듬더듬. 자박자박.

 

자살, 성적 학대, 가정폭력, 외도, 차별.

올리브뿐 아니라 그녀가 아는 모든 이들은 가족 구성원의 관계가 일그러져 있다. 문제없는 집이 없다. 가족은 무엇 때문에 서로를 이리도 힘들게 하는 존재로 남아야 하나.

내 지긋지긋한 식구들을 먹여야 해서요. -p.218​

지긋지긋한 존재이지만 나를 지탱해 주는 존재가 가족일 텐데 툭툭 끊어져 버린 관계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화권과 생활 라이프에서 오는 이질감이 크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노년의 삶 곳곳을 지나는 파동은 무심한 현재를 깨운다. 나를 둘러싼 공동체의 삶 따위가 관심 밖을 넘어선 지금이지만 이 책은 다양한 가족의 모습과 각자의 가치관, 삶의 그늘과 빛, 세대 간의 대립과 공존,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주목하게 된다.

 

올리브처럼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 모두를 대하는 잣대나 방식도 다르고 서로의 주파수가 달라서 오는 편견도 어쩔 수 없다. 올리브의 참견이 고마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지랖이나 꼰대기질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고 그녀의 직언을 조언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겠으나 아니꼽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다. 그럼에도 올리브에게 마음을 여는 이유는 올리브가 그들의 외로움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외로움을 귀신같이 잘 포착한다. 올리브 자신은 지나쳤을테지만 그만큼 외로움을 잘 안다는 얘기. 물론 시인인 앤드리아의 지적질에 한방 얻어맞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긴 했지만.^^ 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면 자신의 참모습을 알게 된다며 훈수를 두었었던 그녀였지만 결국은 알 수 없는 인생처럼 자신을 정확히 안다는 건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다.

내게는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다. 진실로 나는 한 가지도 알지 못한다. - p.460 ​

 

키 크고 덩치 크고, 맙소사, 이상하기까지 한 올리브에게 잭은 마지막손을 내민다. 둘은 노년의 사랑을 이어가지만 처음의 자리에 대한 허전함과 그리움을 온전히 떨치진 못한다. 현재의 만족감보다 추억을 먹고 사는 노년의 일상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감정에 사로잡힐 것 같다. 하지만, 절대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야, 신디. 계속 이어가는 거지. -p.212 어떻게 지난 시간들속에서 사람만 쏙 빼 놓고 이어갈수 있을까. 잭이 먼저 떠나버렸으니 더 외롭고 두려운건 올리브의 몫으로 남았다.

 

 

 

부란 뭘까. 결혼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될까.

결혼생활이 무르익는다는 건!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 아는 거라는 말도 일리는 있다.

"잭, 대체 왜 그렇게 그릇을 박박 긁어먹는 거야."

"톰, 그 사과 다른 데 가서 마저 먹을 수 없어?"라는 말로 상대의 자존심과 관계에 금을 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렇듯 점점 입을 닫게 되는 건 어디까지나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을 최소화하고 싶은 자기방어다. 그 나이쯤 되면 언쟁도 논쟁도 피곤한 일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합을 이뤄나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포기 또한 중요한 행위이다. 이해는 포기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디는 곧 닥쳐올 죽음 앞에 원망이 가득하다. 자신의 부탁을 종종 잊어먹곤 하는 남편이 못마땅하다. 그런 그녀에게 올리브는 남편의 입장을 대변해 준다. 신디는 자신의 죽음만을 떠올리다 다시 남편의 삶을 들여다본 것이다. 2월의 햇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보였던 것처럼.

<햇빛 : LIGHT> 여러 이야기 중 가장 괜찮은 단편이었다.

 

부모와 자식 간의 불협화음도 안타깝다. 올리브의 서운함보다 크리스토퍼의 행동을 반추해보면 엄마와 아들 간의 대화가 닫힌 게 문제였다. 그들의 전화선 너머에는 각자의 이야기만이 흐를 뿐이다.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전편으로 거슬러가야겠지만 모자의 관계가 물리적인 거리보다 더 멀어 보여 참 안타까웠다. 올리브의 지나친 배려는 크리스토퍼로 하여금 자식이 아닌 타인을 대하는 듯한 감정을 불러왔고 크리스토퍼의 무관심은 올리브의 삶에 편협한 잣대를 세운다. 켄트 하루프의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에서도 노년의 사랑을 이해 못 한 자식들 때문에 결국 사랑을 포기하는 부모를 보며 화가 많이 났었는데 부모와 자식이기 전에 한 개인의 삶을 먼저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필요하겠다. 어설프고 어색한 관계는 며느리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감대를 찾아가다 더 이상의 진전 없이 어색한 사이로 끝나고 만다. 오히려 작가가 지나치게 이어붙이지 않은 점이 현실적이다. 잭의 조언대로 아들 내외와 함께 하는 동안 얻은 깨달음이라면 자신 때문에 전 남편 헨리를 잠시 떠올리며 미안해했다는 것. 더 이상 아들과의 거리를 좁히기는 어려울 거라는 것이다.

 

퉁퉁 붓고 늙은 손이 그녀의 세월을 말해주는듯해서 애잔하다. 그럼에도 올리브는 여러모로 닮고 싶게 만드는 캐릭터다. 독립적이고 당차고 고집도 있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주눅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실수나 잘잘못에 대해선 타협하고 굽힐 줄도 안다. 선생님이라서 그런 걸까. 지적질의 대가지만(레스토랑에서 만난 잭의 싹수없는 옛 동료에게 소말리아족이 아닌 소말리족이라고 콕 집어주는 통쾌함) 그래서 꼰대인 듯도 하지만! 꼰대의 삶을 하나씩 벗겨가는 듯해서 맘에 들었다.

 

<친구>편에서 편견 때문에 속 쓰림을 경험하고서도 자신 또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은 비겁했지만 소말리족 간병인에게 보여주었던 마음 씀씀이를 보면 편견이 아닌 식견이었다고 정정해야겠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강인하고 싶었다. 담배꽁초를 주우려다 쓰러졌을 때 가까스로 일어나는 장면은 인간승리가 아닌가. 하지만 늙은 앞에 한 번씩 무너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심장마비로 쓰러진 후 의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립스틱을 발랐다 창피해하며 울던 장면은 애잔해서 잊히질 않는다. 여자로서 정체성이 희미해져가는 나이지만 예쁘게 보이고 싶은 그 마음. 세월을 향한 원망에 추함과 창피함이 뒤범벅이 된 올리브의 그 마음을 토닥여주고 싶었다.

 

올리브의 나이듦을 바라보면서 멀지 않은 미래를 그려 보았다. 죽음을 피할 순 없지만 죽음의 순간들이 일상이 되는 일은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올리브는 이제 정말로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을 넘어 외로이 주검으로 발견되는 자신의 미래가 두렵다. 외로움의 악취란 그런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랬기에 마지막 <친구>편을 읽으면서 나도 서로의 안부를 체크해 줄 친구를 꼭 두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진심으로 안심되는 일이니까.

 

우리 모두 어떤 시기를 지나는 중이지. -P.432 ​

올리브는 또 좋아하는것이 생겼다. 타자기와 장미나무.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는 소리와 지고 또 피는 장미의 생명력앞에 자기반성과 함께 자신의 생도 그냥 지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올리브덕분에 나도 오늘을 잘 지남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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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01 2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건빵님 ‘햇빛‘ 단편 정말 좋죠! 미드로 제작 된다고 하니 건빵님 꼬옥 보세요 ^0^

건빵과 별사탕 2021-02-01 20:57   좋아요 1 | URL
다른 단편에 비해 진짜 삶이란 이런 것! 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나저나 미드라니. 진짜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