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의 꿈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라틴문학을 많이 접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마음이 열린 것은 환상문학이라는 장르였다. 몽환적이면서 게다가 반전의 묘미로 잔상이 오래 남았던 [파이 이야기]와 영화 [일 포스티노]의 정적이면서도 깊이가 있는 이야기들은 나에게 생소한 라틴문학으로 눈을 돌리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야기 없이 넘어가는 페이지에서 당황스러움이 밀려왔고 내재되어 있는 의미 전달은 고사하고 절반을 넘기면서도 글자만 읽힌 듯했다. 또한 1920년대의 아르헨티나의 모습이 잘 구현돼 있다고는 하나 당대 배경지식의 부족이 문제였다. 그렇게 무언가 허공만 짚어대다 추리의 끝이 보이는 막장에 이르러서야 서서히 막이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은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는 한 남자를 중심으로 그가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조각난 기억을 찾는 동안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그 속에서 선과 악은 드러나고 헛된 욕망과 어리석은 운명을 놓지 못하는 인간들을 보며 그 시대를 비판하는 작가의 의도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거기서 자네는 지난주에 죽었고, 거기서 영원히 살고 있네. -p.70

20대 초반의 가우나는 경마에서 딴 돈을 먹고 노는 일에 탕진하기로 한다. 생의 스승처럼 받드는 박사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의견에 동조하고 유흥가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땐 그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일부가 조각나 버린다. 다시 일상을 살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도 하지만 무언가 걸린 듯 그때의 시간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인생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뚜렷함 없이 발레르가 박사와 일당들에게 의지하는 사이 그에게 또다시 한탕의 행운이 주어진다. 이미 그를 지배한 운명은 그를 재현된 과거의 기억 속으로 몰아넣는다.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인 마법사의 조언과 클라라의 믿음도 져 버린 채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흐릿한 이미지를 쫓게 되고 여정은 기억을 살려내지만 역겨움과 충격을 안겨준다.

현재를 배신하는 대가로 과거에 충실할 수는 없는 거야. -p.201
운명이란 인간이 만든 아주 유용한 발명품이다. -p.244
운명은 교묘하게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p.257

마치 꿈인 듯 계시인 듯 애매모호한 상황은 계속되고 기억의 단서가 하나씩 맞추어가는 동안 현실에 눈을 뜬다. 술에 취한 듯 자본주의에 취했고 도덕적 이성이 어설펐던 3년 전의 모습이 서서히 뚜렷해지자 그는 조금 정의로워지고 싶었나 보다. 그는 정말 어떤 운명에 놓인 사람이었을까.

그 무엇도 확신을 내릴 순 없었다. 마테차를 한잔 곁들인다면 생각들이 좀 정리될까.ㅎ 마법사의 말처럼 과거는 과거에 살도록 버려두어야 했었다면 가우나의 삶은 큰 변화 없이 흘러갔을까. 또한 그를 변화시킬 마법사가 죽지 않았다면 또 달라졌을까. 그렇듯 시대의 영웅은 누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런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이루어내야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달빛에 반사된 칼날 끝에 내건 그의 운명에서 느껴지는 비장함에 애도를 표하고 싶어졌다.


현재는 단 한 번만 존재한다.
그것을 그는 알지 못했었다.
그것이 과거를 일으키려는 마술, 즉 가우나의 미약한 시도가 실패한 이유였다.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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