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세 가지 이야기 속 세 남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는 공통점을 가진 이들에게 주어진 생의 상실감.
그리고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 그 상실감의 무게감을 덜어내기 위한 몸부림을 통해 다양한 인생의 철학적 의미들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인간이 시련과 고난을 통해 안정된 고도에 정착하기까지 그들의 믿음의 일부는 깨지거나 부서지고 수정된다.
집이라는 안정된 공간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본능에 가깝다. 그것이 집이든 누군가의 품이 되었든.

역시 얀 마텔이구나를 느끼며 단편 같지만 단편이 아니었던 이 짜임새 있는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것은 파이 이야기를 보고 난후 한동안 그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느낌과 흡사했다.
강중약이라는 리듬을 유지한 듯한 타이틀.
1. 집을 잃다, 2. 집으로, 3. 집 에서 볼 수 있듯이 먼저 인간에게 있어 집이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랑은 집이다.
매일 아침 수도관은 거품이 이는 새로운 감정들을 나르고, 하수구는 말다툼을 씻어 내리고, 환한 창문은 활짝 열려 새로이 다진 선의의 싱그러운 공기를 받아들인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집이다.
그에게도 한때 그런 집이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p.35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죽음의 삼연타를 경험하고 그 충격으로 뒤로 걷는 남자 토마스가 등장한다. 더 이상 삶에게 뒤통수를 가격 당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주위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뒤로 걷는 일에 열중한다. 그런데 어느 날 고미술 박물관 보조로 근무하던 중 다른 시대의 물건인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를 발견한다. '이곳이 집이다'라는 반복된 구절에서 집을 잃고 방황한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까. 토마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 일기 속에 등장하는 성물인 십자고상을 찾아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떠난다. 짧은 일정으로 인해 숙부에게 빌린 낯선 고철 덩어리를 끌고.

생사람을 잡아먹으며 배를 불리던 시절, 율리시스 신부가 겪었던 신과 인간에 대한 고뇌를 읽어내려가며 함께 하는 여정은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 오죽하면 파이 이야기에서 바다를 표류하며 점점 몰골이 처참해져가던 그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정말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비웃음은 가여움이 되고 그 가여움이 다시 경멸로 변하는 등 수시로 감정이 널뛰었다.

"지친다! 지쳐" 토마스가 나직하게 내뱉는다. 인간은 고난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눈을 뜨게 해줄까? 고난의 결과로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까?-p.127

처참한 여정만큼 포르투갈의 산이 그토록 높았던가 싶지만 실로 도착한 산도. 그리고 그가 그토록 찾던 성물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가 그토록 믿었던 모든 것들에 토악질로 대신한다. 그렇게 삶을 향한 울부짖음은 신에게 간청하는 건지 그리운 아버지를 찾는 건지 알 수 없는 부르짖음으로 끝난다.

우리는 진화된 유인원일 뿐 타락한 천사가 아니다. 토마스는 외로움에 짓눌린다.-p.159

그렇게 강력하게 한방을 맞은 후 읽어내려간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말이 좀 많다. 병리학 과장인 에우제비우는 주로 시신을 부검한다. 한 해의 마지막 날 한밤중에 그를 찾아온 아내는 추리소설과 복음서의 관련성과 적합성, 합의와 동일성에 대해 열변을 토한 뒤 사라진다. 둘 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흥미였지만 이건 뭔 소리야 하는 사이 또 다른 의문의 여인 마리아가 등장한다. 남편의 시신을 들고 찾아와 부검을 의뢰하는 묘령의 여인. 그리고 다시 짜 맞춰지는 이야기들.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라며 중얼거리며 남편의 품속으로 들어가 버린 여인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기묘한 분위기를 빠져나와 맞은 세 번째 이야기는 감동이었다. 파이 이야기를 자꾸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동물과 인간의 조합 때문이다. 호랑이가 수풀을 헤치고 사라지던 장면과 오도가 이베리아 코뿔소를 향해 달려나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유사한 감정을 느꼈다.
상원위원으로 인생의 상위계층을 달리던 피터에게 떠나버린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그 큰 빈자리에 어느 날 갑자기 한 마리의 침팬지가 대신하고 들어온다. '그것'이 아닌 '그'라고 칭하며 인생의 동반자로 낙점한 침팬지 오도에게 피터는 그가 느끼는 유사 감정인 자유를 갈망하는 눈빛을 읽어내린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모든 걸 내던지고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떠올린 행선지는 두 살 때 떠나온 포르투갈이었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듯 오도와 그곳으로 간다. 때때로 머릿속에선 선택의 결과와 후회가 소용돌이치지만 오도를 볼 때마다 드는 강한 믿음은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아가게 한다.

서로만의 완벽한 언어로 교감을 하는 사이 피터는 오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의 여정은 시간에 대한 압박감이나 공간에 대한 두려움 따위도 잊게 한다. 인간의 회귀본능에 따른 자연스러움일까, 포르투갈의 높은 산! 부모님이 살았던 작고 고립된 마을을 본 순간 그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의 환대에 진정한 동거가 시작된다.
이곳에서 오도의 행동 하나하나를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자 진정한 삶이 몸에 배기 시작한다. 인간에 대한 불편했던 감정들을 오도의 진실된 행동을 통해 치유받으며 내려놓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좋아진다.

세상이 시계라는 것을 이미 어제 알아차렸다. -p.347

그는 시간이라는 경주에서 족쇄를 풀고 시간 자체를 음미하는 법을 배웠다.
......(중략)
오도가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가 오도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놀랍다. -p.366

오도가 가득히 들어찬 삶, 오도를 위해 내어준 시간들, 피터는 그 속에서 마냥 행복에 젖는다.
생의 마지막 호흡을 오도에게 내어주며 진정으로 오도에게 자유를 안겨준 피터를 보며 난 이 모든 것들에 눈물을 쏟아냈다.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유인원, 인간, 십자고상, 아이등이 보인다. 그렇듯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얽혀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절묘하게 만난다. 아하~~~! 하는 긴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과 동시에 무수하게 스쳐가는 질문들도 함께 쏟아졌다.

마치 마법 같고 구전동화 같은 이야기에 담요 한 장 얻어덮은 느낌이다. 인생의 고난 뒤에 얻게 되는 깨달음이 안도감과 평온함을 가져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기를 거쳐 인간은 진화한듯하지만 여전히 힘겹고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존재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종교적 믿음에 기대고 그 어떤 다른 것들에 의지하지만 본연의 삶은 과연 무엇일까. 무언가 더 있을 거라는 이상적인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내려놓고 시간 속에서 무엇을 호흡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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