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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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고요한 밤의 눈] 이후로 두 번째 만나는 혼불문학상 작품이다. [고요한 밤의 눈]을 통해 사회를 통찰하는 시각을 키웠다면 [칼과 혀]는 한중일 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시선을 따라 펼쳐지는 긴장감과 미묘한 심리전쟁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배경의 묵직함이 깔려있지만 맛있는 요리의 재료처럼 신선했고 추억과 기억 속을 헤매는듯한 몽환적인 장면에 인간적 냄새를 찾느라 코를 벌름거렸다. 그래서 조금은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짚어내기에 어려움이 따랐다. 적군의 목을 따기 위한 과정이라지만 첸이 줄기차게 바치는 요리에 과하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본디의 목적보다 요리에 미쳐있는 건 아닌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가 내 요리에 맛을 들이고, 계속해서 요리를 먹어주는 일은 고마운 일이다. 기회가 된다면 나는 그 점에 대하여 진심으로 허리를 굽힐 용의가 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그것이 설령 내가 죽여야 할 상대라 하더라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p.241

우선 이 소설은 만주국에 대한 배경지식이 더 필요했고 미식가였다면 첸이 만들어내는 요리에 군침이 돌았을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온갖 요리 재료들에 익숙해져야 했으며 그 음식들이 전하는 다양한 감각들을 글로 나마 익혀야 했다. 마치 요리의 위대함을 전수받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각종 요리에 정신없이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소설의 막바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이다. 1932년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앞세워 만주국을 세운다. 실질적 통치는 관동군 사령관이 통치하였으며 소설은 일본이 패망하고 도망가던 시기까지를 다룬다. 소설에 등장하는 일본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는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고증된 사실에 근거하여 전쟁을 기피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 자신을 요리 애호가이자 예술비평가로 칭한다. 불상을 향해 늘어가는 욕망과 전진과 후퇴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며 기회를 엿보는 인물이다.
그런 오토조를 중심으로 그를 암살하기 위해 제 발로 황궁을 찾은 중국인 요리사 첸과 조선인 여인 길순까지 이렇게 세 명의 시선으로 이야기는 짜 맞춰지고 있다.

소련군의 심상찮은 움직임 따위는 옆으로 밀어놓으며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그때, 그의 관심사 안으로 들어온 건 요리사 첸이었다. 그의 등장을 의심하면서도 첸의 거친 손을 바라보며 그의 손에서 탄생할 각종 요리에 이미 반은 마음을 빼앗긴다. 요리에 관해서만큼은 자신만의 엄격한 잣대를 드리우며 첸을 시험에 들게 한다.

순수성만이 요리의 정신에 부합되니까, 단 하나의 오점도 없는 재료들이 요리사의 손길을 거쳐 불과 물과 한바탕 섞일 때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거듭난다. 하나의 요리가 장인의 손을 떠나 인간의 혀와 맞닿는 최초의 순간, 세상의 진귀한 요리는 바로 그 한순간으로 존재한다. 어머니가 화로에 정성껏 구워주던 쇠고기도 첫 번째 입안에 넣어진 게 가장 맛이 훌륭했듯이, 남은 접시의 음식은 오로지 그 첫 젓가락을 위해 존재한다. -p.32

그렇게 일 차전을 앞둔 첸의 모습에서 긴장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독자를 자극하는 긴장감과 오토조의 촉수를 건드린 건방짐에서 첸의 강한 면모가 엿보인다. 그렇게 오토조를 향한 첸의 증오는 그가 다스리는 불과 함께 강하게 타오른다.
어느새 첸의 요리에 오토조의 혀는 조금씩 길들여지고 그렇게 두 사람이 음식으로 무언의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착각을 하는 사이 첸이 계획한 독살 파티는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미 오토조의 혀는 첸에게 저당잡힌 뒤였고 반대로 첸의 목숨 또한 오토조에게 저당잡힌 꼴이 된다. 그렇게 지독한 몰골로 첸은 더 혹독하게 자신의 도마와 씨름한다.

여기서 또 다른 조선의 여인 길순은 첸과 오토조와의 관계 사이에서 무채색 같은 느낌을 전한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을 떠돌며 조곤조곤 구어체로 전하는 음성에서 슬픔과 한이 묻어난다.

저 모래바람이 물러가고 나면 거기 내가, 아니 우리가 원래 가야 했던 그런 길 하나쯤 보이게 될까? -p.43

오빠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납치를 당해 위안소로 끌려가고 고단하고 몸서리치는 나날들을 보내지만 첸은 그녀의 인생에 구원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를 괴롭히는 오빠의 존재는 환영이라는 이미지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길순의 상반된 내면이 아닐까. 혁명의 소모품으로 사라질 것인지와 지친 몸뚱이 하나 편히 누이고픈 욕망이 내면에서 계속 싸우는 듯하다. 오토조의 곁에 머무는 동안 기회와 연민 사이를 줄타기하는 모습에서 여성의 여리고 인간적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다.

국수 한 그릇을 먹을 시간만은 주고 싶어. 어차피 죽게 될 테니까. 앙숙처럼 상대를 겨누던 칼과 매일 끓여 바치던 요리는 뜨거운 국수 한 그릇으로 화해하게 되겠지. 나는 그 마지막 순간을 저들에게서 빼앗고 싶지 않아. -p.273

결국 진정한 승부는 칼이 아닌 혀가 가려낸 것인가.
유난히 반가상에 집착하는 오토조는 불상과 함께 돌아가려던 허황된 집념에 발목이 잡힌다. 그리고 대륙의 요리가 아닌 길순의 구수한 청국장을 한술 한술 떠넘기는 사이 오토조의 영혼은 한 알 한 알 허공으로 흩어져 간다. 조금은 허황된 느낌의 캐릭터와 대사가 와닿지 않는 면도 있었지만 강자와 약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요리라는 매개체로 그 모든 상황이 뒤엉키는 모습이 흥미롭다. 하지만 여전히 첸과 오토조의 마지막을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오토조가 자신을 공격하던 닭을 혀로 맛보며 증오를 덜어내는 장면을 끌어와서 첸과의 관계를 이어붙인다면 조금은 이해가 될 듯도 하지만.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 요리와 그렇게 비워진 접시. 그리고 감흥. 왜 이 삼박자가 나에게는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가끔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문 하나가 저 부엌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어느 부엌이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린 배를 채울 무언가가 숨어 있게 마련이지. 죽이고 죽는 전쟁쯤은 잠시 잊어도 좋은 그곳.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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