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듣는 자는 이미 자기가 한 말을 거의 잊어버렸다.
그러나 기억하는 자는 이제 막 기억하기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 p.14

 

 

병든 시대를 살아가는 슬픈 사람들, 독재라는 그물에 걸린 채 서서히 죽어가는 예술가들, 줄리언 반스의 이번 소설은 시대의 음악가 쇼스타코비치의 내면을 다룬 책이다. 많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쇼스타코비치의 생애가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반스의 천재적 글 솜씨에 한 천재 음악가의 고뇌를 온전히 들여다보고 그 시대에 드리워진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을 각 장의 첫 문장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아는 것은 그때가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 -p.17
그가 아는 것은 지금이 최악의 시기라는 것뿐이다. -p.91
그가 아는 것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나쁜 최악의 시기라는 것뿐이다. -p.167

클래식에 문외한이어도 대중들의 심장을 사로잡은 곡이 하나 있다. 그 곡을 작곡한 이가 누구인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누구인지를 몰라도 이 유명한 왈츠곡의 선율에 전율을 느껴본 이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바로 '왈츠 2번'이라는 곡은 각종 매체와 영화 배경음악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희극과 비극을 잘 조합해 놓은 듯한 잔잔하면서도 강한 선율에 몸을 맡기면서 쇼스타코비치의 인생을 오버랩해보면 그의 인생의 고뇌가 느껴지기도 한다.

1930년대, 희망과 절망을 오가다 어느 정도의 침묵을 유지하면 그나마 날숨을 쉴 수도 있는 불안정한 삶 속, 시대는 스탈린 독재가 극에 달하던 시절로 수많은 예술가들이 탄압당했다. 그 시대의 중심에 있던 쇼스타코비치는 그가 그 시대의 소음에 순응하기만 한 것은 아님을 재조명한다.
어디서부터가 시발점인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그는[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부터임을 직감한다. 윤년의 악운에 대한 미신까지 덤으로 끼얹고 그날 이후 그는 늘 작은 가방을 옆에 둔 채 잠을 청한다. 음모는 계속 생겨나고 음모의 어둠 속으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사라져간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는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는 살아남아 시대에 순응하고 그의 음악을 한다. 장조와 단조의 사용에 따라 생명이 좌우될 수도 있는 말도 안 되는 시대에, 스탈린 체제의 충성스러운 이들을 위한 음악을..
그래서 스탈린 시대를 대표하던 음악가로 적절한 지도를 받고 낯선 미국 땅에서도 스탈린을 찬양하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음을 감지한다. 자신의 죽음보다는 가족의 안녕을 걱정해야 하는 가장이었으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때에는-그 자리에서 죽게 될 테니- 위장을 해야 했다. 유대 민속음악에서는 절망을 춤으로 위장한다.
그래서 진실의 위장은 아이러니였다. 독재자의 귀는 아이러니를 알아듣도록 맞춰져 있지 않으므로, -p.125

아이러니의 감각은 비관주의를 누그러뜨려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
그러나 아이러니는 -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 - 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 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p.126~127


그는 스탈린의 붉은 베토벤으로 남고 픈 생각이 없었기에 당에 가입하는 것조차도 꺼린다. 시대의 소음에 온전히 불협화음을 낼 수 없었던 그는 침묵으로 적절히 타협도 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침묵도 스탈린에 대한 저항으로 비칠 것을 우려해 적당히 순응하는 방법도 택한다.
자, 예술은 누구의 것이지?라고 묻는 그의 질문이 그러하듯이..

독재자가 사라져도 권력층은 그를 놓지 않았으며 그는 또 다른 두려움에 놓인다. 그렇게 인생은 비관적으로 끝나버릴 것이라는..
그렇게 그는 자기혐오에 시달리며 그 자신을 벌레라고 자학하기에 이르고.. 그리고 술을 마신다. 그의 신경과 영혼은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상태로 버텨낸다. 겁쟁이가 되기보다는 영웅이 되는 편이 되려 낫다고 느끼며 겁쟁이의 고단한 삶의 종착지로 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러시아의 유명 작곡가로 움직임을 옮겨보지만 이미 그의 기억 속을 옥죄는 고통은 이미 부정적인 이미지들에 자리를 내주었다.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난 이들의 풍부한 감수성은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일이 자신에겐 독이 될 수도 있다. 더욱이 정치적 기술을 한 가지도 갖추지 못한 그는 더더욱 불안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오로지 그는 시대의 소음에 발맞추기 위한 음악이 아닌 시대의 소음을 밀어내 버리는 음악을 원했다. 그가 시대에 순응하였든 타협을 보았든, 아니면 나름대로의 항의를 하였든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의 음악이 우리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기에 그의 진실했던 음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시대적 평가가 어떠했든 줄리언 반스는 그를 어느 정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한 인간으로, 천재성을 지닌 것만 빼고는 보통의 인간이었음을, 죽음을 두려워하고 지나치게 용감하지 않으며 적절히 순리대로 살려고 했음을.. 누군가는 비겁했다고 이야기할지언정 책을 읽고 나면 누구인들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위로 섞인 공감을 말이다. 역시 이런 극한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늘 그렇듯 안타깝다. 가끔 현실에서도 이렇게 안타까운 일을 당하는 이들이 있어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지금도 정국을 뒤집은 블랙리스트 사건이 시대만 다를 뿐이지 또 반복되고 있지 아니한가..이런 역사는 더이상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p.135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우리 존재의 음악- 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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