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등여행기 - 도쿄에서 파리까지
하야시 후미코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여행의 목적이라고 하면 목적지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모든 의미를 두어야 하듯이 이처럼 여행기를 담은 책들은 내게 많은 기대감을 준다. 게다가 생생한 여행담이 주는 낯선 경험은 그것이 현재의 모습이든 과거로의 여행이든 무한한 그림을 담아볼 수 있어서 더 좋다. 정은문고는 지난번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산책기에 관한 책으로 나의 오감을 충만하게 해 주었는데 이번에 출간된 책은 일본의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여성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여행기이다.
우선 일본 작가에 관해선 아는 정보가 거의 없는 나로선 낯선 작가와 낯선 열차여행에 대한 정보가 조금 필요했다. 그래서 뒷장 후미코에 대한 정보와 옮긴이의 글을 먼저 읽어 보았다. 그녀의 작품은 일본의 유명 영화감독 나루세 미키오의 손을 거치면서 유명세를 치렀다고 하니 그녀의 작품에 대한 관심도가 커졌다.

그녀가 떠났던 여행의 시기는 전쟁 중이었던 1930년대로 이 시대의 한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 일본 여성작가의 여행이 마냥 부러울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그녀의 여행기를 온전히 머릿속에 띄워내기가 쉽지 않았다. 전쟁을 주도하고 있던 침략국이라고 해도 여성이 혼자 떠나는 여행이 안전할리도 없거니와 그녀의 여행 목적과는 달리 힘겹게 기차에 오르는 비참한 서민들의 삶도 분명히 존재하였을 것이기에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기차에 올랐을까에 맘이 더 쓰였다.
그러나 그녀의 출생과 성장과정의 배경지식을 알고 나니 그녀가 그렇게 떠나는 여행길은 그녀가 살고자 하는 이유였고 그녀의 문학적 지평을 넓히는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당대 여류작가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와 시대적 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아픔,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간 순간 등을 떠올려보니 여성으로서의 삶의 방황이 전해졌다.

 

 

 

 

그녀는 불안정했던 그 시대에 삼등열차에 오른다. 이 삼등열차는 부산발 파리행 열차로 내겐 낯선 경로의 철도 이름이었다.
부산을 거쳐 시베리아를 지나 파리에 도착하는 열차인데 무엇보다도 파리에 도착하기까지 기차에서 만나는 서민들의 모습이 인상 깊다. 
11월의 춥고 혹독한 겨울날, 중국에 도착해서는 간담의 서늘함을 느껴야 했고 전쟁의 흔적으로 생사를 걱정해야 한다. 그렇게 낯선 곳을 향한 두려움은 그녀의 넉넉지 않은 여행경비만큼이나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여행은 길동무, 세상은 정"이라는 말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 그녀에게도 주어지는데 통하지 않는 언어에도 미소로 화답하는 사람들, 담요 한 장이 아쉬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더 필요한 이에게 건네주는 사람들, 별 볼 일 없는 수프 한 그릇에도 온정이 가득 느껴진다. 그렇게 팍팍한 서민들의 삶의 정은 인종이나 이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삼등 열차는 하나의 가족 같으니 어찌 된 일일까요? 한가로운 익살꾼이 많은 덕에 언제까지나 명랑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무산자의 모습이란 아무리 인종이 다르다고 해도 보통 단벌 신사로 조선에서 파리까지 다들 같은 풍채입니다. -p.64

그렇게 도착한 파리에서는 힘든 여정과 파리의 날씨 탓에 몇 날 며칠을 잠으로 보낸다. 그렇게 그녀의 눈에 먼저 들어온 파리의 느낌의 그녀가 묵고 있는 방의 가구와 붉은 벽지만큼 초라하고 비참하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의 몸으로도 씩씩하다. 파리의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거칠고 화려한 파리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든다. 파리 카페의 느긋함까지 즐기면서 말이다. 파리에서 가장 즐거웠던 곳이 카페였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파리의 카페거리에 가고 싶은 생각마저 들게 했다. 작년에 본 미비 포유의 마지막 장면도 여자 주인공이 파리의 카페에 있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또한 여자로서 그녀의 눈에 비친 파리의 부엌과 일본의 부엌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도 인상적이었다. 그 시대의 파리의 부엌에서 느껴지는 여성들의 삶이 마냥 부러운 것은 아직도 여전히 부엌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한국 여성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그녀는 러시아의 빈부차를 꼬집기도 하고 파리인의 쉴 새 없는 키스 문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또한 런던의 루브르박물관에서의 문화재 약탈에 대한 견해도 내놓는다.
런던 박물관은 멋집니다. 큰 목소리로 말할 순 없지만 잘도 세계 각국에서 큰 도둑질을 했구나 싶습니다. -p.159

그렇게 런던에서 잠깐 머물다 여행경비가 바닥나는 통에 돌아가기로 한 그녀는 다시 머문 파리에서의 밀레의 화실을 우연찮게 구경하게 된다. 그녀가 밀레의 그림과 함께 느낀 파리의 시골풍경은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었다.

배를 타기 전 느꼈던 불안감과 무거운 마음은 새파란 하늘과 바다를 보며 씻어버리고 고향을 향한 그리움으로 그녀의 피곤함을 지워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베 부두에서 내리자마자 먹은 가락국수가 얼마나 환상적이었을까.ㅎ

그렇듯 여행은 그녀에게도 집필의 거름이 되어 그녀를 더욱 큰 사람으로 성장시켰다. 그토록 인간적이고 타지에서의 경험들이 그녀의 감수성을 터트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녀가 쓴 일기와 지출 내역을 보면 그녀의 여정이 더욱 실감이 난다. 여행 경험이 자신에게 가장 부귀한 것이었고 있는 그대로를 찾아내는 일에 행복을 찾았으니 그녀의 방랑벽이 공감이 되었다.
"지도를 보고 있으면 유쾌합니다. 인간이 커지는 느낌입니다. -p.153 "라고 말한 그녀처럼 우리를 키우는 건 여행이 아닐까 한다. 나도 여행을 사진으로만 남길 것이 아니라 간략한 여행기를 써가면서 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져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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