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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평점 :
너 자신 외에 너에게 상처 입힐 사람은 아무도 없다. -p.19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7/0425/pimg_7804801561640710.jpg)
이번 신작은 그녀의 소설인생 전반을 잘 모른다면 그녀의 글과 함께 호흡하기에 모자람을 느낄 수도 있겠다.
내가 공지영이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책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였고 그 이후 출간된 책들도 거의 보았다. 그래서 그녀의 책을 만나는 동안 그녀의 생의 굴곡도 함께 느끼며 지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그녀가 사회의 부조리에 반기를 들거나 구린내 진동하는 권력에 맞서고 사회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모습에 더욱 매료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SNS에서 열심히던 시절 덩달아 여러 뉴스 매체의 타이틀로 등장하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그때, 그녀에 대한 비방의 글로 도배된 댓글에 한껏 열을 올린 적도 있었고 종교에 대해 늘 싸늘한 시선을 두고 있는 내게 천주교에 대해서만큼은 조금 유순해진 적도 있었다. 발끈할 땐 발끈할 줄 알고 또 한없이 공감해야 할 땐 공감력을 발휘하던 그녀가 당차고 소신 있는 작가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단편을 묶어 놓은 그녀의 책은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오로지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것들이 이 짧은 단편들에 압축이 되어 있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친절하게도 문학평론가 강유정 님의 해설을 통해서도 충분히 우리는 그녀의 글에 대해 조목조목 살펴볼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이 책은 그녀가 이전에 발표한 단편들 5개를 실어놓은 책이다. 그래서 그녀의 새로운 신작 소설을 만나길 기대했던 이들이라면 다소 실망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편 못지않게 이 단편을 읽고 나서 생각이 더 많아지는 건 아무래도 단편이 주는 힘이 아닐런가 한다.
뭐니 뭐니 해도 다섯 단편 중 가장 각인이 되는 이야기는 이 책의 제목인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이다. 벌써 작가님의 북미팅을 통해 글이 숨은 의도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우선 실화인 듯 아닌 듯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야기에 전설의 고향이 생각날 만큼 소름이 살짝 돋는다. 다른 생명체의 기를 빨아들이고 가까스로 생명을 이어가는 할머니 이야기는 읽는 내내 그녀의 숨은 의도가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역시 공지영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그녀가 보아왔던 삶의 부조리와 보이지 않는 권력의 잔임함에 더욱 날센 비판을 담아낸 것이라고 보아도 될듯했다.
이 세상에는 살아 있는 것들이 많다. 할머니보다 약한 것들도 너무도 많다. 할머니는 그래서 오늘도 죽지 않는다.
장마가 시작된 이래, 오래된 우리 집 정원에는 습기 차고 더운 공기가 진득하게 차 있다. 무언가 썩어가는 냄새가 난다.
비가 오면 잠시 사라졌다가, 싱싱하게 고개를 드는 자운영이나 여뀌의 풋풋한 내음을 압살하며 냄새는 다시 시작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서서히, 그러나 격렬하게 썩어가는 냄새, -p.81
그리고 또 다른 단편[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서는 그녀의 가족사와 출생에 관한 비밀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결국 출생의 진실 유무가 여태껏 살아온 그녀의 본연의 삶을 뒤바꿀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난 청년의 인생과 전두환 정권 시절의 희생양인 교수 K의 삶 등은 본연의 삶을 되찾지 못하고 저물어버린 사람들의 대표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 TV 프로에서 본 전두환 회고록의 실체 때문에 가뜩이나 화가 나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 시절 고문 피해자 K 교수의 이야기에 끊어 오르는 분노와 먹먹해지는 아픔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그 억울한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놈이 회고록이라니..
우리 삶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며 우리 삶의 비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끝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사는 것이라고. -p.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