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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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 외에 너에게 상처 입힐 사람은 아무도 없다. -p.19

 

 

이번 신작은 그녀의 소설인생 전반을 잘 모른다면 그녀의 글과 함께 호흡하기에 모자람을 느낄 수도 있겠다.
내가 공지영이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책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였고 그 이후 출간된 책들도 거의 보았다. 그래서 그녀의 책을 만나는 동안 그녀의 생의 굴곡도 함께 느끼며 지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그녀가 사회의 부조리에 반기를 들거나 구린내 진동하는 권력에 맞서고 사회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모습에 더욱 매료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SNS에서 열심히던 시절 덩달아 여러 뉴스 매체의 타이틀로 등장하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그때, 그녀에 대한 비방의 글로 도배된 댓글에 한껏 열을 올린 적도 있었고 종교에 대해 늘 싸늘한 시선을 두고 있는 내게 천주교에 대해서만큼은 조금 유순해진 적도 있었다. 발끈할 땐 발끈할 줄 알고 또 한없이 공감해야 할 땐 공감력을 발휘하던 그녀가 당차고 소신 있는 작가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단편을 묶어 놓은 그녀의 책은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오로지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것들이 이 짧은 단편들에 압축이 되어 있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친절하게도 문학평론가 강유정 님의 해설을 통해서도 충분히 우리는 그녀의 글에 대해 조목조목 살펴볼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이 책은 그녀가 이전에 발표한 단편들 5개를 실어놓은 책이다. 그래서 그녀의 새로운 신작 소설을 만나길 기대했던 이들이라면 다소 실망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편 못지않게 이 단편을 읽고 나서 생각이 더 많아지는 건 아무래도 단편이 주는 힘이 아닐런가 한다.
뭐니 뭐니 해도 다섯 단편 중 가장 각인이 되는 이야기는 이 책의 제목인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이다. 벌써 작가님의 북미팅을 통해 글이 숨은 의도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우선 실화인 듯 아닌 듯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야기에 전설의 고향이 생각날 만큼 소름이 살짝 돋는다. 다른 생명체의 기를 빨아들이고 가까스로 생명을 이어가는 할머니 이야기는 읽는 내내 그녀의 숨은 의도가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역시 공지영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그녀가 보아왔던 삶의 부조리와 보이지 않는 권력의 잔임함에 더욱 날센 비판을 담아낸 것이라고 보아도 될듯했다.

이 세상에는 살아 있는 것들이 많다. 할머니보다 약한 것들도 너무도 많다. 할머니는 그래서 오늘도 죽지 않는다.
장마가 시작된 이래, 오래된 우리 집 정원에는 습기 차고 더운 공기가 진득하게 차 있다. 무언가 썩어가는 냄새가 난다.
비가 오면 잠시 사라졌다가, 싱싱하게 고개를 드는 자운영이나 여뀌의 풋풋한 내음을 압살하며 냄새는 다시 시작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서서히, 그러나 격렬하게 썩어가는 냄새, -p.81

 

 

그리고 또 다른 단편[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서는 그녀의 가족사와 출생에 관한 비밀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결국 출생의 진실 유무가 여태껏 살아온 그녀의 본연의 삶을 뒤바꿀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난 청년의 인생과 전두환 정권 시절의 희생양인 교수 K의 삶 등은 본연의 삶을 되찾지 못하고 저물어버린 사람들의 대표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 TV 프로에서 본 전두환 회고록의 실체 때문에 가뜩이나 화가 나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 시절 고문 피해자 K 교수의 이야기에 끊어 오르는 분노와 먹먹해지는 아픔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그 억울한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놈이 회고록이라니..

우리 삶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며 우리 삶의 비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끝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사는 것이라고. -p.125

 

 단편마다 실려 있는 삽화가 매력적이다. 모든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는 그림에 시선이 자연스레 고정된다.

 

" 이 등신아, 세상 불공평한지 이제 알았어"라고 말하는 순례의 말 한마디가 모든 걸 말해주는 [부활 무렵]에선 물질이라는 욕망과 빈부격차에서 느껴지는 삶의 패배감에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고단한 삶 속, 그 끈을 놓지 않을 희망은 공감력과 삶을 향한 연민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죽는 거보단 조그맣게 약한 게 나은 거라고 달래면서.

마지막 단편 [맨발로 글목을 돌다]에서는 그녀의 작가의 인생과 그녀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고뇌를 느껴볼 수 있었는데 납북당한 일본인 번역가 H 씨와 위안부 할머니, 그리고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 쓰라린 역사적 사실을 교훈 삼아 자신을 위안 삼고 스스로를 달래고 치유한다. 또한 굴곡 많던 청춘시절을 버티게 해준 그녀의 글쓰기 인생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들춰봄으로써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느껴볼 수 있었다.
때론 나보다 조금 더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극한의 상황 즉 끔찍하고 처절했던 역사를 들춰봄으로써 현재의 삶에 대해 조금 더 유순해지고 겸손해짐을 느꼈기에 정말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생각을 언어로 표현해 소통하고자 하는 행위는 언어 자체의 한계에 궁극적으로 방해받는다.
......(중략)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이라는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를 잡아 수 없이 핀으로 고정시키고 상자에 넣는 일, 죽어 핀으로 고정된 채 상자 속에 넣어진 나비에게 다시 숨을 불어넣는 것은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의 숨결 없이는 불가능하다. -p.185

"글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 ‥‥‥선배가 그런 말했거든. 그 말 생각한 거야. 그래서 병가 내고 책 많이 읽었어. 읽었던 책도 또 봤는데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하나 더 열리는 그런 느낌. 그 문을 여는 열쇠는 고통이었어. 운명처럼 보였던" -p.214

 

 

소설은 시종일관 담담하다 우울하다를 반복하지만 그녀의 녹록지 않았던 인생에 함께 뒹굴었던 그녀의 모든 생각들이 함축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녀의 능력으로 사회를 바꾸는데 힘도 실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해도 될만해 보이지만 때론 무너지고 도망가고 숨고 싶던, 유명 작가라는 떠안아야 하는 불편한 시선마저도 감내해야 하는 그녀의 속내까지 고스란히 전해져서 마음이 아렸다. 
어찌 되었든 시간이 흐르고 인간이 성장한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는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이렇듯 문학이, 그리고 타인의 삶을 통해 얻어 가는 성장의 원동력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날 대강당에 걸려 있던 '걷는 자만이 앞으로 갈 수 있다'라는 표어처럼 여태껏 그녀를 만나온 독자로써 한걸음 한걸음 그녀의 글에 빠져들었고 지금도 내 인생의 거름이 되어 나를 지탱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로 돌아온 그녀, 어쩐지 내겐 '공지영은 죽지 않는다'로 해석이 되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독자로, 그리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이자 엄마라는 공통된 분모를 가진 행운으로 난 이제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이 다시한번 피어날 또 다른 장편소설이 태어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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