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식민지 경성을 뒤바꾼 디벨로퍼 정세권의 시대
김경민 지음 / 이마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  서울의 오래된 기억, 북촌, 익선동 한옥마을은 경성의 뉴타운이었다.
◆◆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한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 정세권의 개발시대



기와장의 묵직함이 주는 고즈넉함이 있는 곳..서울의 유명 관광코스 북촌한옥마을~
가장 한국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그곳은 지금은 더욱 잘 다듬어지고 보기좋게 단장하여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지난 주말 북촌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책을 읽고는 제대로 한옥을 감상하고픈 마음에 들러 보았다.
여기저기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담벼락에 옹기종기 모여 함박 웃음을 짓는 관광객들의 모습에
오래전 이 한옥들이 지어지던 모습을 상상해 보며 정세권님을 떠올려도 보았다.


건축이란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며 자수성가하여 그의 모든 에너지를 조선을 지키는데 힘을 쓰신 분..정세권
그런데 난 이분의 성함을 처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 근대사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흐름만 알고 있는 정도이므로
그의 이름 석 자가 쓰여있었던들 머릿속에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더욱 죄송스럽다.
변명이라도 한다면 우리나라 한옥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부끄럽기까지 하다. 

일제 치하 아래 경성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애쓰시면서 그가 어떠한 생각과 느낌을 가졌었는지 궁금했다.
그분이 남겨놓은 일지나 일기 등이라도 있었다면 더 좋았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컸기에 그의 마지막이 더욱 안타까웠다.
일제의 수난 속에 그가 지키려고 했던 우리의 집.. 한옥~! 
그 시대의 건축물로 남아 있는 북촌마을의 역사와 그의 뛰어난 경영능력에 감탄사가 새어 나올 수밖에 었다.


조선의 건축가 정세권(鄭世權, 1888년 4월 10일~1965년 9월 14일)은 누구인가?

무심히 이 책을 지나쳤더라면 계속 몰랐을 그의 존재, 그런 그의 존재를 알리려고 저자는 몇 년 동안 자료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기록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 당시의 신문이나 통계자료, 인터뷰, 그리고 남아 있는 가족들의 증언만을 통해
그의 업적을 대략 끼워 맞출 수 있었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까울 수 없었다.
나라를 위해 한 몸 아끼지 않았던 분의 업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니..
사진속 그의 모습은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는 듯 하다.




1910년 일본의 본격적인 식민지화가 시작되고 10년이 흐른 뒤 그들의 조선 강탈은 나날이 심해져 갔다.
더욱이 두드러진 것은 경성의 인구변화로 경성을 빠져나간 자리를 일본인들이 채워나가면서 경성 땅에 일본인의 수가 차츰 늘어만 간다.
또한 산업화와 일제의 땅 수탈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이 대거 경성으로 몰리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래서 경성의 조선인을 위한 주택 부족과 경제적 어려움은 더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때 조선인의 주택 수요층을 위한 새로운 조직이 등장하는데
건양사의 정세권을 비롯한 조선인 출신 신흥 자본가 계층, 근대적 디벨로퍼들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드러냈던 그는 1920년에 세운 건양사는 3년 뒤 부동산 시장에서 선두적 위치에 자리 잡게 된다.
대규모 땅을 사들여 서민에게 싼값에 빌려주는 주택임대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것도 정세권이 한 일이다.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보다 적은 비용으로 지을 수 있는 집이 한옥 건설 및 개발이었는데
일제의 탄압과 제약으로 어려운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집단 한옥들을 경성 땅에 세운 점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세권은 단순히 집만을 지은 장사꾼이 아니었다. 그의 탁월한 미래 예측력은 뛰어난 사업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떻게 하면 보다 편리하고 유지비가 적게 드는지를 연구하면서 한옥의 질을 끌어올리는데도 한몫하였다.
1968년 창신동 한옥집단 지구를 보면 그의 업적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일제의 서양식 주택 보급지가 점점 늘어나고 이미 일본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그였지만
그의 뛰어난 지략으로 조선이들이 경성 땅에 발붙이고 버틸 수 있게 해 주어 그 의미는 대단한 것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그의 자본력은 건축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혼을 되찾는 데에도 온 정신을 아끼지 않았다.
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해 주었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인해 일제에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리하여 일제에 많은 재산을 빼앗기게 되고 그의 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아니었다면 큰사전 편찬을 이루기가 어려웠을 것인데 이는 우리 한글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한글학회지에 남긴 내용만 보아도 그의 기쁨이 얼마나 컷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사전이 완성되었으니 이 사전으로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서 십 년이면 십 년만큼 백 년이면 백 년만큼 익혀져서
다른 글이나 말이 아무리 셀지라도 이 한글문화를 엿보지 못하게 합시다.
만세 이르도록 한국 사람은 한국 문화로 더욱더 밝아지기를 축하합시다.(4290년 8월)" -p.180



근대 부동산 지형을 재편한 정세권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의 서울의 북촌과 인사동, 혜화동, 성북동의 작은 한옥들 등을 뿌듯해하며 이야기할 수 있다.
저자의 5년 가까운 노력으로 우리는 보석 같은 분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우리말 큰사전 편찬 사업은 우리말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일식 주택을 지을 것을 강요하던 일제에 맞서 그는
일본 주택은 이을 수 없다면서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 주택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진정 독립운동가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그의 업적을 돌아보고 재평가하여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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