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인간이 구축하고 이룩해놓은 세상은 생존이라는 미명 아래 치열과 처절을 반복하며 흘러간다. 공포와 잔인한 덫, 때론 견딜 수 없고 때론 견뎌야만 하는 그 과정들 속에서 결국 남는 건 애처롭고 외로운 삶의 흉터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은 그저 동화 속 세계관일 뿐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행의 순간을 달래줄 무언가이다.

저자는 이런 주제의식을 열 편의 단편들에 꼭꼭 눌러 담았다. 잘못 뿌리내린 관습과 인간이 저지른 어리석음의 대가는 쓸쓸하다. 냉정한 인간의 본성과 사회상을 꼬집고 비틀 때마다 잔혹동화의 잔상과 허무한 그림자가 남는다.

한 여인의 몸뚱이가 변기 구멍에 처박힌다. AI의 손에 가슴이 찔린 여인은 호흡이 옅어져간다. 집(House)에 집착한 나머지 꿈꾸던 집(home)을 잃어버린 여자는 혼자만의 세계에 꽁꽁 틀어박힌다. 나와 내 가족만 괜찮으면 된다는 독선에 한 소년의 삶은 끔찍하게 기만당한다. 빨대 꽂은 자들의 광기와 빨대 꽂힌 자들의 멍한 눈빛에 소름이 돋기는 매한가지다.

눅눅함에 찌든 밤.

내쉬던 깊은 한숨이 사라지고 귀여운 토끼 한 마리가 갉아먹던 시원한 복수극에 웃음 지었다. 핏덩이로 태어난 아기가 터져버렸을 때 오히려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욕에 눈이 멀어버린 왕자에게 배신을 당한 공주가 신의 청(영원의 삶)을 거절하며 끝(죽음)이 있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잠깐이나마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선 자와 빛을 향해 나가는 자를 보며 그곳이 어디든 삶을 지탱하는 힘은 생존을 자각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이 쓸쓸함이란.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로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저주 토끼>와 조용하고 평화롭고 소박하며 따뜻한 곳(이런 곳이 절대 있을 리가 없다)을 원했던 <즐거운 나의 집>과 사랑 이야기라고 여겼던 <재회>의 막판은 가히 식스센스급의 반전을 보여 주며 닭살을 돋게 한다. 잔상의 여운이 강렬했던 건 <머리>다.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어디선가 나를 어머니 하며 부를 것만 같아서.






피임약을 남용하다 덜컥 자가 임신이 되어버렸다는 기발한 설정에서 시작된 <몸하다>는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남성 배우자를 반드시 찾아야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설정까지 더해져 내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반드시, 아무나라니. 남성 배우자가 없다는 이유로 완전해질 수 없다니. 더 웃기는 건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마지막 편인 <재회>는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야 한다는 것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여러 이유로 과거에 묶여 나아가지 못한다. 그들에게 절박한 건 삶 그 자체가 아니다. 삶은 불안했다. 나는 그 불안으로부터 잠시나마 도망치고 싶었다. -p.298 는 그녀처럼 어느 외국의 광장에 앉아 잠시나마 현실 도피를 즐길 수 있다면 살아있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렇지만 생존(전쟁과 학대)을 위협받을 만큼의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그때의 시간들이 되풀이된다. 살아있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했던 묶인 삶. 다시 끈을 동여 묶으면서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온 그가 괜찮아라고 말하며 가버렸을 땐 쓸쓸함의 결정판을 보고 말았다.

인생이 불행이라는 삶의 저주에 묶여 있다고 여긴다면 비틀린 채 흘러가는 미래를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다. 굳이 그렇게까지 비약할 필요가 있을까. "너는 어떤 슬픔이 그리워서 묶이기를 원하는 거야?"-p.314 라는 물음은 너무나 애처롭고 외롭다. 그렇다면 죽음을 선택한 그들에게 그래도 살아야만 한다고 설교하는 건 기만이 아닐까.

우리네 정서가 그득하고 스산한 기괴함이 돋보이는 단편이었다. 냉소적 시선에 담긴 유머까지도 기발하다. <머리>에서 그녀 외 주변인물들이 머리를 대하는 무신경한 태도는 가히 인상적이었다. 내버려둬요. 별일아니잖아. -p.48

그나저나 눅진 머릿속을 우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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