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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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정 표현이 서툴다. 침묵은 나의 무기였고 솔직할 자신이 없으면 피했다. 재빠르게 얼굴을 숨기는 거북이처럼 내 감정을 숨겼다. 고로 난 감정싸움을 극도로 싫어한다. <밝은 밤>에서 유독 신경이 거슬린 건 지연과 엄마, 그리고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였다. 반투명 막을 쓴 사연들은 그저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 하나면 충분했다. 그렇지만 현재의 그녀들.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꼬일대로 꼬여버린 그 풀리지 않는 관계가 내내 명치를 건드렸다. 그들은 현재의 감정에만 집착하거나 포기하거나 잠복한 상태로 상대를 위한답시고 거리를 이~~따만치 벌려둔다. 끝내 할머니가 들려준 과거사가 그녀들의 거리를 좁히고 그 사이에 기름칠을 할것이라는 믿음이 어느 정도 통하긴 했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피로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의 안타까움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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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반짝이는 걸까. 어린 지연은 눈부신 희령의 밤하늘을 품었었다. 다시 희령을 찾았을 땐 엄마와 할머니가 벌려놓은 거리만큼 건너뛴 뒤였고 지연은 분풀이를 하듯 다시 엄마와의 거리도 벌려놓기 위해 이곳을 택했다. 이혼 후 망가져버린 회로를 겨우 이끌고 내려온 이곳에서 지연은 할머니를 만났다. 어린 지연이 그랬듯 서른두 살의 지연도 할머니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지연은 당장 내 편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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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지연에게 최대한 예를 갖춘다. 쓸데없이 묻지도, 아픈 곳을 찔러보지도 않는다. 마치 다 안다는 듯이. 오히려 묻는 쪽은 지연이다. 할머니는 지연에게 자신의 엄마를 닮았다고 말한다. 사진속에서 자신과 닮은 여인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던 지연은 처음으로 할머니의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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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의 딸로 태어난 증조모(삼천)와 그런 백정의 딸을 거둔 증조부. 백 년 전 시간을 거슬러 온 문턱에서 나는 한 남자의 순정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으나 그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증조모의 삶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백정의 딸이라는 굴레와 아픈 어미를 버렸다는 죄책감과 남편의 무심함까지 견뎌야 했다. 그 외로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한건 서로의 처지를 헤아려 준 새비 아주머니였다는 걸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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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은 그렇듯 자신의 뿌리를 거슬러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는다. 지연은 마음을 꺼내 씻어서 널어 두었다 다시 넣고 싶을 만큼 마음을 덜어내고 싶어 한다. 오랜 시간의 상처가 딱딱한 퇴적층이 된 지연은 과거에서 이유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엄마의 엄마의 삶을 이해하면 자신에게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들의 뻔뻔함을 납득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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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혼자가 된 지연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자신이 개새끼 같다고 느낀다. 삼천과 새비 아주머니의 사연을 듣다 보니 감정 분출이란 걸 제대로 해 본 적 없던 지연은 그녀들과 어딘가 닮아 있다. 백정의 딸로 태어난 삼천에게 외로움과 체념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새비 아주머니는 가세가 기울때마다 시댁 사람들의 타깃이 되고 원폭 피해자가 되어 돌아온 남편이 죽자 쫓겨나게 된다. 곪아 있는 건 언제든 터질 준비가 되어 있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 반기의 시작은 새비 아주머니였고 자연을 포함한 통쾌함의 삼종세트가 반가웠다. 당신이 기러고도 인간이냐며 속시원히 시모에게 쏘아부치던 새비 아주머니, 한번만 더 그런말 했다간 당신 내손에 죽는다며 남편에게 날을 세운 삼천의 분노, 늘상 엄마를 무시하던 삼촌에게 지연이 쏘아올린 마지막 한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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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계가 한결같을 순 없다. 삼천과 새비아줌마, 희자와 할머니와의 관계 역시 전쟁의 굴곡에 휘둘린다. 그럼에도 그들의 관계는 어려울수록 빛을 발했다. 살뜰했던 편지와 애틋한 몇 장의 사진을 뒤로하고 끝내 전하지 못한 진심은 안타깝지만 서로를 웃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사람들과 죽음의 그림자를 달아나게 한 따스한 손길들은 그녀들을 어디에서나 지탱해 주었다. 그러한 우정이 없었다면 그녀들의 과거는 온통 암흑이었으리라.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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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헤어짐 그 연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연은 헤어짐을 견디지 못한다. 그녀에게 이별은 늘 갑작스럽게 왔다. 언니의 죽음과 어린 시절 할머니와의 헤어짐, 그리고 남편과의 이혼. 자신의 감정은 늘 배제된 채 이루어진 이별 때문에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렵다. 늘 혼자였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는 지연에게 고백한다.

"내 얘기 들어줘서,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p 251​

할머니는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준 지연이 고마웠겠지만 오히려 지연은 마음의 동토층이 녹았음을 체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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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그 사람에게 프레임을 씌우고 주변과의 관계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찰나 같고 그 먼지 같은 시간들을 외롭게 버티도록 방치하는 것일까. 백정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비 없는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혼녀라는 이유만으로 침묵하고 감내해야 했던 여인들은 그들끼리 소통의 다리가 되어 그 험난한 시간을 지났고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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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지연의 대화는 매번 서로를 후벼파는 것으로 끝난다. 꼬여버린 관계 뒤틀리고 비꼬인 대화. 지연은 이해받지 못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엄마의 치부를 건드리는 방식을 택한다. 정작 자식에게 쓴소릴 들어야 하는 건 아빠 같은데 말이다. 딸 앞에선 욕설을 남발하는 아빠라니. 지연은 그 사이 길강아지 한 마리를 떠나보냈고 위험천만했던 사고도 당한다. 그녀들의 선택과 후회를 떠올리다 문득 이 지겨운 감정싸움의 끝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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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학자가 된 희자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인생을 잘 견뎌내기 위한 암호는 '내게 누군가가 있다'라는 믿음이 아닐까. 그러한 믿음만 있다면 우리의 밤은 점차 밝아질 것이다. 지금 내게 있는 누군가를 떠올려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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