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혜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9
크누트 함순 지음, 안미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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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를 지나 숲으로 통하는 기나긴 길.

그 길을 낸 것은 누구였을까? -p.9

우리는 이미 누군가가 터놓은 길을 걷는다. 희미한 발자국 위에 포개어진 수많은 발자국들 덕분에 조금은 덜 고된 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땅의 혜택>은 그저 제목 하나 믿고 들인 책이다. 무언가 아주 바르고 정직한 삶의 흐름을 보여주리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역시 이야기는 그런 기대에 정점을 찍는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명제에 걸맞은 삶. 변수와 오차는 있을지언정 인간 삶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뿌리박고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삶의 향수도 시대가 낳은 것이겠지만 지금도 그 가치를 찾아 도시를 떠나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한 남자가 황무지 위에 선다. 그는 그곳이 최적의 땅임을 안다. 흙을 만지며 사는 일. 그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그의 거친 손은 자신이 정착할 곳을 알아차린다. 하루 또 하루 그의 노동이 황무지에 뿌려진다. 그렇게 잔뿌리가 퍼져가고 살림은 불고 운명의 짝까지 합세해 가족도 이룬다. 이제 그의 땅은 누가 봐도 탐이 날 정도의 폼새를 갖춘다. 그에겐 늘 계획이 많았고 시간은 늘 부족했다. 집을 짓고 헛간을 짓고 제재소를 짓고 그가 흘린 땀의 가치를 환산한다면 백만장자감이다. 이사크가 지나온 발자취를 부정할 이는 없다.

하지만 과연 이 모든 게 그만의 노고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음을 잉에르를 보며 알게 된다. 인적이 드문 산속이지만 이사크의 흔적은 오가던 사람들의 눈과 입으로 전해지고 어느 날 그의 바람대로 집안일을 도와줄 처자가 찾아온다. 묵묵히 두 사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며 각자가 맡은 일을 척척해나가며 마음을 맞춰나간다. 그의 허풍과 그녀의 장단이 보통 농촌 부부의 모습이라 웃음이 났다. 작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똑똑한 사람도 바보로 만들고 바보도 똑똑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정의를 덧붙이면서.

이사크보다 사회성이 있었던 잉에르덕에 살림의 질은 나아지고 달달한 애정표현하나 없이도 순풍 순풍 태어난 자식들로 인해 황무지에 삶이 한가득 들어찬다. 분명 그녀는 굴러들어온 복덩이였다.

그럼에도 돈은 오로지 이사크의 주머니에서 들고나갔다. 첫째 아들에게 보낼 돈을 가져갔다는 이유로 내던져지다니. "두드려 패지 않으면 길을 들일 수가 없다니까."-p.180 순간 화가 났지만 이후 이사크는 후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만 보면 참으로 안정적이고 잔잔한 삶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일구어놓은 땅의 소유권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고 인근 광산을 개발한답시고 사람들이 꼬인다. 더군다나 잉에르는 셋째 아이를 낳자마자 죽이게 되는데 그 일로 형을 살게 된다.

그럼에도 감자가 없으면 목재가 있었고 목재가 없으면 가축이 있었고 잉에르의 노동의 빈자리를 대신할 여인도 있어주었으며 정직하고 성실한 그의 성품 때문인지 주변엔 좋은 이들이 더 많았다. 농장이 커져갈수록 아들들은 힘이 되었고 더 늙어 기운이 빠져갈 땐 잉에르가 손을 맞잡는다. 아들과 예초기로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 역시 웃음이 난다.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역전극이다.



이사크가 주의를 기울이며 씨앗을 뿌리고 경외심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을 때 밀레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물론 그 그림들의 숨은 의미와 이 목가적인 삶이 일치하진 않지만 그림만 보았을땐 <만종>과 <이삭 줍기>속에 이사크와 잉에르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같았다. 그의 이름이 이삭과 닮아 있는 것이 의도한 것이겠지. 그런 정성이 통해서일까. 그의 땅은 날씨의 변덕에도 다른 땅보다는 상황이 좋았고 훗날 그를 영주라는 지위까지 올려놓는다.

1부가 끝나고 2부로 넘어가면 이사크가 일군 땅, 셀란로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또 한 여인의 영아살해 사건이 등장한다. 1부에 이어 2부까지 다룬 걸 보면 그 당시에도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이 한 문장은 잊히질 않는다. 왜 남자들은 벌을 받지 않느냐는 겁니다. -p.378

왜 지금도 남자는 책임을 지우지 않는 걸까. 함께 책임을 묻는다면 저출산 시대 이런 끔찍한 희생은 줄어들지 않을까.

잉에르의 변화 역시 눈여겨볼 점이다. 그녀의 삶은 언청이였던 삶과 후의 삶으로 나뉠 만큼 변화가 두드러진다. 수술 후 달라진 삶의 시선과 욕망의 크기 역시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녀는 흉한 얼굴 때문에 봄을 빼앗겼다. 여름에는 자연의 것이 아닌 공기로 숨을 쉬었고, 그 바람에 육 년을 도둑맞았다. 하지만 아직 피가 뜨거웠기 때문에 가을에 이리저리 열기를 내보내야 했다.-p.448

그녀의 일탈로 이사크의 불안감은 커져갔지만 스스로 자정작용을 하듯 그녀 역시 정상궤도를 찾는다. 어쩌면 언제나 큰 동요 없이 지내온 이사크때문이 아닐까. 감옥에 간 잉에르를 기다릴 때의 그의 마음은 순수 그 자체이기도 했다. 착하게 지내면 그녀가 빨리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정말 어린아이 같지 않은가.

평생을 땅을 일구는 자로 살아간 이사크. 그는 그야말로 몸이 닳도록 일을 하여 기적을 보여 준 인물임엔 틀림없다. 그의 주위로 모여든 자들은 땅을 사고팔기도 하고 땅을 견디지 못해 떠나기도 한다. 작가는 의도대로 땅을 선택하고 뿌리내린 자들의 삶을 축복하는 쪽을 택한다. 도시가 아닌 땅 위에서의 삶이야말로 허영과 분수를 일깨우고 단정한 숨결을 불어놓는 곳임을 깨우친다. 땅의 혜택이라 하면 부동산과 투기로 연결 짓는 지금 시대에 이사크와 땅의 혼연일체가 살짝 부담스럽지만 강조하고자 하는 건 진실되고 정직한 삶의 모습일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옳다고 인정해 주며, 서로 경쟁하거나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 경주하는 대신 손을 잡고 가지. -p.469

안타깝게도 지금은 자연과 상부상조할 것이 아니라 떠받들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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