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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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월드에 발을 들이고 그 세계에 빠져갈 때쯤 요 에세이를 선물 받았다. 세랑 작가처럼 지구를 사랑하고자 하면 지구를 사랑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사랑을 받게 된다. 이런 것이 연대다. 이런 좋은 연대는 현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여행에 목마른 이들이 많을 것이다. 좋은 것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값어치는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다. 작가라면 그런 여행이 더 귀한 자산이 된다. 작가가 비행기를 탄 것은 2012년이었지만 지금에서야 에세이가 출간되었으니 에세이가 그만큼 쉽지 않은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여행의 본질과 여행의 이유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감흥들이 그냥 그저 그런 이야기되지 않도록 다듬는 일에는 내공이 더 필요하겠다. 유명 작가라면 더더욱.

여행 에세이는 어쩔 수 없이 뻔한 흐름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나 여기 갔어요. 이런 사람을 만나고 이런 곳을 보았어요. 그리고 이런 곳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동을 받았어요. 그럼에도 작가의 여행 에세이를 찾게 되는 이유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진짜 놀란건 작가가 기혼자란 사실이었다. 난 왜 작가가 미혼이라고 단정지은걸까. 너무 관심이 없었구만. ㅎㅎ

작가가 생강 알러지가 있다는 글을 보며 세상에는 희귀한 병도 많지만 알러지 반응 또한 그 범위가 다양함을 실감했다. 남편은 생강 알러지는 없지만 생강을 극도로 싫어한다. 작가는 알러지가 있음에도 아헨의 쿠키를 뿌리치지 못하고 고생을 했다고 하니 이 쿠키는 한번 먹여보고 싶다.

작가는 어린 시절 앓았던 병으로 인해 여행을 즐기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살아있다는 것들에 경의로움을 느끼게 한다. 작가의 지구 사랑의 시작은 병에서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여행을 즐기지 않던 작가는 친구의 설득에 넘어가서 뉴욕으로 향했고 어쩌다 친구따라 아헨에 머물기도 한다. 뜬금없이 엄마는 작가의 친구를 보러 가자며 오사카행을 제안했고 안전한 신혼여행지로 타이베이를 선택한다. 정말 놀라운 건 런던을 가게 된 이유다. 우연히 응모한 영화 이벤트에서 1등에 당첨이 된 것이다. 저런 행운이라면 정말 로또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지구에서 한아뿐>에 적어 둔 그런 로또 말고.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p.75


내가 만든 좋은 인연들로 연결된 발자국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웠을까. 행복은 연결망 위에 놓여 있는 듯하다. -p.160 낯선 장소지만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는 즐거움은 또 어떻고. 모든 낯선 풍경들이 선사하는 진기함. 이런 것들을 느껴본 지가 오래된듯해서 살짝 갈증이 인다. 뉴욕에서 방문한 미술관 리스트만 보아도 알차고 새롭게 얻은 취미(주인 잃은 물건 찍기)도 멋지다. 뭐니 뭐니 해도 현지의 음식을 맛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

이야기가 가진 아주 투명하고 여린 힘, 읽는 이의 영혼에 밝은 지문을 남기는 능력에 대해서 멈추어 생각할 때가 있다. -p.373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들의 성격들이 어떤 이유로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니 환경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내가 작가의 글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 안전한 공기층에서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좋은 걸 잘 녹여내는 능력. 그리고 그 글을 잘 흡수하는 독자. 이러한 상호작용이 활발해지려면 많은 이들이 독서를 즐겨야 될 텐데. 책이 다른 매체에 뒤처지는 게 늘 안타까울 뿐이다. 부모님의 예술 사랑 역시 부러운 조건이다. 나도 좋아는 하는데 그걸 아이들과 공유하지 못해 안타깝다.

지구 온도를 낮추는 게 시급해졌다. 분명 지구에는 지구를 사랑하지 않는 지구인도 있다. 지구보다 순간의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에겐 지구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다정하지 않다. 게다가 지금은 여행이 훨씬 더 위험해져서 안전한 걸음을 보장받을 수도 없고 가게 되더라도 타인의 경험이 곧 나의 경험이 될 수도 없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비행기를 타는 일도 썩 편하지만은 않고 관광산업의 난폭함에 일조한다는 생각에 거부감이 일기도 한다.

그렇다고 방구석 여행이 꼭 답은 아닐 터이다. 그저 일상의 좋았던 것들을 리스트로 적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작가처럼 무언가 늘 구체적으로 좋아하는 것도 닮고 싶은 점이다. 많은 이들의 지구 사랑이 더해져 더없는 다정함으로 지구 곳곳을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여자들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는 작가는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또 현기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잃은 가능성은 결국 인류가 잃은 가능성이 될 확률이 높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마지막으로 여성 장르 작가라는 이유로 악플 테러를 일삼고 맘에 들지 않는다며 집요하게 괴롭히는 이들은 꼭 천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귀신님 엄한 인간들 괴롭히지 말고 저런 인간 좀 잡아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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