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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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연주의의 거~~~장! 이라고 불리는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내겐 낯선 작가다. 월리엄 포크너,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영향을 준 '거인'이라는 소개글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오래 잡고 읽으면 팔이 저릿할 정도의 두께감이 있지만 책장이 잘 넘어갔다. 1890년대의 미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러 군상들 중 미모를 겸비한 시골처녀의 도시 상경기이자 성공기를 그리고 있지만 '거친 파도 위를 표류하는 영혼'이라는 타이틀과는 달리 그다지 굴곡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굴곡진 삶을 살다 비극적 결말을 맺은 그가 더 기억에 남는다.

열여덟의 나이에 도시를 찾은 캐럴라인 미버. 도시에 발붙일 동안 머물게 될 언니네는 그다지 형편이 넉넉지 못했고 캐리는 얼른 일자리를 구해서 생활비라도 보태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된다. 도시로 나간 그녀는 화려한 도시가 내뿜는 광채에 넋이 빠지고 자신 역시 그 광채의 구성원이 되리란 환상을 품는다. 하지만 아무런 경험이 없는 아가씨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라곤 단순 노동직뿐임을 깨닫자 도시가 던지는 냉혹한 대우를 견딜 수 없어 한다. 다시 시골로 내려가야만 하는 신세가 돼가던 캐리는 우연히 시카고행 기차 안에서 만났던 바람둥이와 재회를 하게 되고 쾌락을 좇는 강한 열망(돈이란 모두가 갖고 있고 나도 가져야 하는 것. -p.89)이 그녀를 깨운다. 어쩌면 캐리의 행운의 문은 이미 기차 안에서 열린 것일 수도.

여자에게 미모는 타고난 재능이자 얼마든지 삶을 뒤흔들 기회를 제공한다. 캐리처럼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삶의 강렬함에 반응이 빠른 여성이라면 능력 있는 남자가 무조건적으로 내미는 호의를 잘라내긴 어렵다. 지폐 두 장의 유혹도 이겨보려 했으나 드루에가 밀어붙이는 물질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택했음에도 드루에의 돈에 묶이게 된 그녀를 보며 씹던 껌 신세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차 그녀에게 색다른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게 그녀에게 두 번째 행운의 문은 연극 무대에서 열렸다.

하지만 인생은 또 다른 관계 속에서 꼬인다. 드루에의 친구였던 허스트우드가 캐리를 품으려고 회사 돈을 훔친 뒤 캐리를 속여 뉴욕행을 감행한다. 이쯤되니 두 남자 사이를 갈팡질팡한 캐리를 비난하게 되는 건 그녀가 드루에의 경제적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의 도시 상경기에 그녀가 자력으로 일구어낸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는 그녀에게 세 번째 행운의 문이 되어준다. 뉴욕은 배우의 꿈을 꾸기엔 최적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행운의 문은 그녀 스스로 연다. 허스트우드의 몰락이 한몫했지만 그제서야 그녀는 도시의 광채 속에서 자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남자들은 선량해야 하며 모든 여자들은 정숙해야 한다. 악인이여, 그대는 어찌하여 실패했단 말인가? -p.126

작가는 유독 캐릭터를 설명함에 있어 정교하다. 그래서일까. 등장인물들에게서 뚜렷한 선과 악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사회적 관습 아래 판단할 뿐이다. 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점을 비난할 수 없다.

드루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나의 정복은 얼마나 달콤한가.'

캐리는 불안에 떨며 이렇게 탄식했다. '아, 내가 잃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p.127

더 확대해보면 지독한 바람둥이일거라 여긴 드루에도 캐리에겐 언제나 다정하고 친절했다. 오히려 캐리가 떠남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그에게 있어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았으며 돈이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원하는 상대와 즐길 수 있음을 잘 알았다.

허스트우드 역시 사랑에 목이 마른 남자였을 뿐이다. 돈 앞에서 주체할 수 없이 사랑의 욕망이 들끓었을 뿐이다. 작가가 결론 내린 그의 가족의 모습에 동정이 인다. 이런 인물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안 봐도 뻔할 것이다.-p.119

그는 '완벽하게 꾸며진 집'에서 가족들의 지갑으로 지냈을 뿐이었다. 아내에게서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모습이 되려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절박했고 욕망은 강렬했다. 그렇지만 두려움에 약했다. 훗날 캐리가 떠나갔을 때 그녀를 향해 날을 세우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그 정도로 되먹진 않았다.

그렇다면 캐리는 나쁠까. 두 남자를 이용했다기보단 그들이 들러붙은 게 아닌가. 캐리 역시 대놓고 뻔뻔하진 않았다. 어차피 결혼도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함이었지만.

캐리는 여느 여인들이 그렇듯 좋은 옷에게 설득당하고 도시의 여인들의 우아함을 습득한다. 캐리는 선천적으로 흉내를 잘 냈다. -p.144 배우의 자질이 통하는 시점이다.

안정된 부에 대한 안도감보다 죽도록 일만 해야 하는 처지를 벗어던질 수 있다는 안도감이 훨씬 크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하는게 인간본성이다. 허스트우드에게 욕망의 허기를 들킨 것과 거절을 못 해 스스로 사랑에 빠졌다고 믿어버린 어리석음이 죄라면 죄일 뿐.

가난은 서로를 구차하게 만든다. 사랑의 도피도 가난의 굴레 속에서는 무의미하게 변해간다. 사랑은 여자가 줄 수 있는 전부에요.-p.251와 같은 말은 연극 대사로 만 감동을 줄 뿐이다. 뉴욕에서 허스트우드는 시카고에 있던 캐리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대도시는 많은 것을 품고 있지만 쉽게 내어 주지 않는다. 열망과 희망이 살아 숨 쉬던 전성기는 이미 지났고 경험한 적 없던 궁핍함을 해결해야만 한다.

캐리가 뉴욕의 당당함에 매료되어갈 때 허스트우드는 점점 무너져간다. 조강지처를 버린 대가라기보다는 그 역시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뉴욕의 대거 실직자의 대열에 자신도 끼게 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부가 곧 행복이라고 믿었던 캐리는 벤스 부인의 사촌인 에임스를 만난 후 배우로의 삶에 진정으로 눈을 뜨게 된다. "부자가 된 들 뭐하겠어요. 이런 것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어요." -p.421

그럼에도 캐리는 자신의 성공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사람들과의 이별.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대도시의 차가움이었다. 운명의 여신이 처음부터 철저히 캐리의 편이었음에도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찾아오는 우울감은 쉽게 떨쳐내기 어려웠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던 그녀가 잠시 변화하는 순간은 무대였을 뿐이다.

나라고 달랐을까. 도덕적 판단은 접어두고 그녀가 쫓은 열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충만한 외적 조건과 내적인 순진함으로 헤쳐나간 시간들이 어쩌면 그녀에겐 최선이었다. 흔들리던 자유의지가 제자리를 찾았을 때 그녀는 욕망의 헛됨을 마주한다. 어리석었던 과거를 치유하는 길은 궁핍한 이들에게 지갑을 여는 일임을 깨닫는다. 그녀의 미래가 추락이 아닌 안전한 착륙이 될 수 있길 바라본다.

오래전 소설이지만 욕망 앞에 드러나는 인간은 본능은 한결같다. 자본주의의 앞면과 뒷면의 차는 지금이 훨씬 더 잔인하고 돈에 살고 돈에 죽는 우리의 삶의 공식은 변함이 없다. 소설에서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운명과 우연의 그 어디에도 진정한 사랑과 샘솟는 행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꿈을 꾼다. 불완전한 우리가 불안정한 미래를 만나 꿈꾸는 그 갈망의 끝이 우리가 원하는 행복이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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