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리아의 딸들 (특별판, 양장)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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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태어난 해 이 소설도 출간되었다. 남성과 여성의 지배 구조가 뒤바뀐 세상. 이 발상의 전환이 우째 신선하고 통쾌해야 되는데 3분의 1정도의 지점까지 달려오면서도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자연은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며 흘러간다. 제아무리 인간이 그 어떤 동물보다 이성을 앞세워 월등하다고는 하나 절대평등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제도였다. 그럼에도 자연의 불공평함을 치유하는 것은 모든 문명의 임무이기에 그 화살이 여성을 억압하고 눌러왔던 남성이라고 해도 약자를 향한 불편한 감정과 동정 그리고 심지어 연민이 생기기 마련이다.

소설에서 움(여성)과 맨움(남성)이라는 명사만 바꾸면 딱 그것이 과거 여성들의 삶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작가는 작정하고 비꼰다. 그래서 소설 속 성적 표현이 은근히 불쾌하고 저속하다. 헌데 바꿔 생각해 보면 남성이 저지른 수많은 성착취와 성범죄를 떠올린다면 충분히 이런 분위기로 그려질 수밖에 없겠다.

이갈리아는 모계 중심,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모장적 사회이다. 남성은 그저 씨앗만 제공하고 부성 보호를 받은 뒤 가정에 충실해야만 하는 존재다. 음하하. 이게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이갈리아는 그걸 이뤄냈다. 남성의 지배욕과 권력욕을 없애버리고 철저히 여성의 그림자로 살게끔 하기 위해 거세까지 감행하며 남성의 성을 눌러왔다.

그랬기에 여성들의 오만은 극에 달한다. 거침없는 행동에 거부감이 들다가도 여성들의 지난한 삶을 떠올리면 비난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가슴을 맘껏 드러내놓고 거리를 활보하고 월경을 축복받으며 출산을 귀히 여기는 곳에서 당당히 살아간다. 움의 성기는 위대하고 신성한 지혜를 가졌으며 생명을 순환하는 핵심이자 문명의 상징이 된다. 남성들은 여성의 체구보다 크게 성장하거나 가슴 털이 자라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며 부성보호만 잘 받고 아이를 팔에 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무한한 은혜의 대상이자 축복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여자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아이를 양육하며 가사를 책임지는 하우스키퍼의 삶이 전부다.

어떤가. 움에 의해 쓰인 역사가. 그렇지만 무언가 죄다 거꾸로 된 세상에 온 것만 같은 착각도 들지 않는가. 성의 역할이 정확히 구분되고 지켜져야만 하는 세상. 이것이 과연 평등주의(Egalitarianism)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Egalia)로 만들어진 나라의 모습인가. 그렇지 않음을 느낄 것이다.

그저 얼마나 여자들이 이가 갈렸으면 이갈리아라고 지었을까하며 농을 던져본다.



분명한 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사회는 균열이 일기 마련이다. 여성들이 여성 스스로의 권리를 찾으려 발버둥을 쳤듯이 이곳 이갈리아의 남성들도 마찬가지이다. 게다 인정되진 않지만 이곳에도 게이와 트랜스젠더가 존재한다. 진정한 사랑은 허울뿐이고 한쪽의 일방적 희생은 사회를 병들게 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유독 페트로니우스에게 연민이 인다. 꿈을 꿔볼 수조차도 없고 개인의 삶을 존중받을 수 없다는 것만큼 맘 아픈 일이 없다. 심지어 그의 엄마조차도 아들의 심적 고민보다는 남성의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대하려 한다.

당시에는 큰 이슈를 몰고 왔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내게는 페미니즘도 유토피아도 아닌 그저 날카로운 풍자소설로 읽힐 뿐이다. 지금도 남혐과 여혐에 관한 여러 이슈나 그런 표현들이 영 달갑지만은 않다. 뜻도 모를 단어들은 왜 그렇게 자꾸만 생겨나는 건지. 그런 이슈를 키우는 게 오히려 언론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페트로니우스는 여친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폭력을 당한다. 그 사실을 아빠에게 울며 고백하지만 아빠도 가정폭력의 희생양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 아빠는 아들에게 충고한다.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말기를.

어쩜이리도 여성들의 삶을 그대로 옮겨 왔을까.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남성들이 아랫도리를 가리기 위해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페호)이 여성의 브래지어와 같은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남성들이 그걸 벗어던지며 자유를 외쳐댈 때 여성들은 혐오의 시선을 던지며 경악한다. 그 우스꽝스러운 장면의 뒷면에는 여전히 '여성답게'라는 관습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씁쓸함이 밀려온다. 노브라를 선언하는 게 왜 욕먹을 일인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역시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페이지였다. 페트로니우스는 엄마 루스에게 오래전 존재했을 가부장제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에 대한 엄마의 대답이 압권이다.ㅎㅎ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그녀의 반박. <태고의 시간들>에서 여자들이 나누던 대사가 떠오른다. 여자들만 있다면 애초에 전쟁 따윈 없었을 거라는.

소설이 태어나던 해와 지금의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분명 눈에 띄는 변화는 있다. 그러나 첫 문장 "결국, 아이를 보는 것은 맨움이야." 라는 말을 바꾸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육아는 엄마 몫이다.

"결국, 아이를 임신시키는 사람은 맨움이에요." -p.130 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전히 임신에 대한 책임은 여자 몫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여성의 임신과 출산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이 사회는 여성차별이 곳곳에 존재하고 심지어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해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는 남성들도 있다. 어쩌면 지구가 망하는 그날까지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평등에 한발 더 다가가기 위해 투쟁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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