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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와 폐허의 땅
조너선 메이버리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지구로 귀환하는 우주탐사선 안에서 방사능으로 인해 돌연변으로 진화한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중국에서 발생한 새로운 독감의 일종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청은 이 사단이 어느 실험실에서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모든 사람에 동의하는 사실은 이 사태가 원인 모를 질병으로 시작되었다는 것뿐이었다. -p.71
인류에게 바이러스는 공포 그 자체다. 바이러스는 자꾸만 진화해서 인류의 삶을 뒤흔들고 있다. 어쩌면 여지껏 인간의 상상력안에서만 존재했던 좀비가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원인 모를 질병이 톰과 베니가 사는 이 땅을 오염시켜 죽은 자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으니까.
대재앙이 덮인 첫 번째 밤. 그 시간 이후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도망을 쳐야 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울타리를 쳐놓고 살아가야 한다. 울타리 밖은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좀비들이 득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톰과 베니는 첫 번째 밤에 부모님을 피해 미친 듯이 도망쳐야 했다. 이미 좀비가 되어버린 아빠의 공격을 피해 엄마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피신시키고 희생된다. 한날 두 형제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어떻게 된 연유로 각자가 지닌 그날의 의미는 너무나 달랐다. 동생 베니에겐 시간이 필요했고 그걸 누구보다 알고 있었던 형 톰은 동생의 비난을 견디고 인내하며 묵묵히 하던 일을 해 나간다.
좀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이미 한차례 크나큰 상실을 경험했던 두 형제 중 톰은 세상이 아무리 비극으로 치닫고 있다고 해도 생명의 가치를 잊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은 가족들의 부탁을 받고 이미 좀비가 되어 버린 가족을 찾아가 영결식을 치르는 일을 한다. 좀비에게 영혼이 남아있다고 해야 할지, 육체만 남았다고 해야 할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끔찍한 모습으로 생명체를 뜯는 모습은 차마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그렇기에 톰이 목숨 걸고 하는 일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딜 가나 어느 시대나 어떤 상황이나 그러한 가치를 훼손하는 이들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 말이다. 찰리는 그런 자들의 대표격 인물이다.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옳고 그름을 힘과 과시욕으로 남발하고 다니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다. 베니가 그에게 동경의 시선을 보낼 때만 해도 그가 얼마나 악랄한 자인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그럴듯하게.
시체와 폐허의 땅에서 좀비가 위험한 존재라면 찰리는 두려워해야 할 존재로 성장한다. 어딘가에 있다는 게임랜드에서 벌어지는 악랄한 범죄는 게임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현실로 옮겨 놓은듯하다. 작가가 그렇게 이름을 칭한 데는 깊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게임에 미친 나머지 현실과 가상공간의 경계가 흐릿해져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니까. 생명의 가치를 염두에 두지 않은 참혹한 결과다.
고통과 상처와 긴장이 온 세상에 드리워져 있음에도 야생화들이 자유를 만끽하는 듯한 비현실적인 풍경이 자아내는 의미는 희망이 아닐까. 어떻게보면 무엇이 비현실적인 풍경인지 정신을 차려야한다. 톰과 베니는 찰리 일당을 저지하고 법이 사라진 곳에서 질서를 찾으려 했다. 영결식을 행하면서 얻게 된 진정한 가족의 의미와 절망 속에서도 우정과 사랑을 놓지 않으려 했다. 사라진 소녀를 찾으러 떠날 땐 그 어떤 히어로물의 주인공들보다 멋져 보였다. 무엇보다 베니는 형과의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부쩍 철이 들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형과 함께 자신이 살던 집을 찾게 되는 장면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영화화되어 준비 중이라니 기대가 된다. 물론 좀비떼의 습격을 받는 장면이나 좀비 사냥꾼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무진장 불쾌하겠지만 톰과 베니의 당당한 행보가 기대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