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수화 통역사 세트 - 전3권 - 데프 보이스 + 용의 귀를 너에게 +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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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는 언어다.

그럼에도 우리는 수화를 신체적 신호 그 이상의 섬세한 언어로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유독 수화를 눈여겨본 때가 있었다. 코로나 재난 방송 당시 질병관리청장 옆에서 열심히 수화를 하시던 여성분을. 아니 그분에게 시선이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빠른 손놀림도 신기했지만 얼굴 표정과 몸짓까지도 굉장히 섬세해서 수화라는 언어의 세계에 잠깐 호기심도 생겼었으니까.

 

BTS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뮤비 엔딩에 보면 잠깐이지만 수화가 등장한다. 아이 러브 유를 뜻하는 손가락 수화였는데 이번 신곡 <퍼미션 투 댄스>에서는 아예 작정하고 수화로 춤 동작을 선보였다. 알고 보니 뮤비에 등장한 수화는 국제수화라고 한다. 수화에도 국제수화가 있고 나라마다 쓰는 수화가 다르며 각 나라 안에서도 방언처럼 수화의 종류가 또 나뉜다. 게다가 농인의 특성에 따라 사용되는 방식도 여러 가지라 수화가 생각보다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번에 만나게 된 <데프 보이스> 시리즈를 통해 알게 되었다. ​

 

희한하게 관심이 생기면 호기심이 충족될만한 무언가가 등장한다. 그러니 이 책이 나에게 온 것은 운명이다.ㅋ

<데프 보이스>의 저자 마루야마 마사키는 수화 통역사를 통해 그들만의 세계의 문을 독자들에게 열었다. 들리지 않는 자들. 즉 청각장애를 가진 이들의 세상 말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작가의 노고가 빛나는 작품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나 역시 작가 이길보라님이 의심했듯 작가가 코다이거나 혹은 농인이 아닐까 했었으니까. 더 놀라웠던 건 이길보라님이 코다였다는 사실이었다. 작가님의 책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을 바로 들였다.

 

 

 

 

 

주인공 아라이는 들리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들리는 자로 태어난 코다(CODA : Children of Deaf Adults)이다. 언뜻 생각해 보면 들리지 않는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라도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가 싶겠지만 아라이에겐 그들과 동일하지 않다는 조건 때문에 '흠이 있는 아이'가 된다. 혼자서만 듣게 되는 빗소리도 낯설고 기이한 경험이지만 '가족과 세상'사이에서 홀로 '통역'자가 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라이는 원치 않았던 존재가 되어 그만의 소외감과 차별감을 떠안게 된다.

우리편? 아니면 적?​

청인과 농인의 어중간한 경계에서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 하나는 오랫동안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미묘한 통증을 남긴다. 그랬기에 그는 더 이상 수화를 쓰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다시 통역자의 삶으로 이끈다. 찬찬히 받아들인 시간 속에서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된다.

 

<데프 보이스>는 아라이가 수화 통역 일을 하던 중 법정 통역 일을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추리물이다. 그전에 아라이가 맡았던 세세한 일화를 보면 농인들이 얼마나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무시당하고 차별받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수화로 대화하는 이들을 보며 들리지 않는다고 막말을 하는 자들, 농인이라고 처음부터 대놓고 무례하게 구는 자들뿐 아니라 부작용이라는 단어와 묵비권이라는 단어조차도 제대로 전달하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며 농인들이 사회와 소통하는 일이 얼마나 퍽퍽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한 예는 나머지 시리즈에서 더욱 드러나는데 위급한 상황에서조차 어디에도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시스템이나 들리는 사람들 속에 절대 섞이지 못한 채 투명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심지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삶에 마음 한켠이 먹먹해져 온다.

농인의 유전적 요인을 의심해 강제적 불임시술까지도 자행되었었다는 사례는 충격이긴 했으나 아라이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그 두려움이 이해가 된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싸울 수 없는 자들에게 변호사는 필수다. 그렇지만 농인들에게는 그보다 더한 능력자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쓰는 언어를 제대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수화 능력자말이다. 코다로 살아온 아라이는 누구보다 농인들의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기술에 마음이 더해져야 통하는 법이니까. <데프 보이스>에서 아라이를 통해 닫혔던 문이 열렸다면 다음 시리즈부턴 그 열린 문을 통해 더욱 복잡 다양한 세상을 들여다보게 된다. 진심은 통한다는 진리가 들어먹히는 광경은 아름답다. 미숙해 보였음에도 아라이의 진심이 통과한 주변은 한결 부드러워지고 밝아진다.

 

 

 

 

작가는 처음부터 <데프 보이스>를 시리즈로 엮을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순전히 독자들의 응원덕이었다. 속편까지 무려 7년이라는 기간이 걸리긴 했다지만 단편을 장편처럼 엮어놓아 무리가 없다. <용의 귀를 너에게>는 수화라는 특수한 언어가 음성 언어를 거부한 한 아이에게 귀가 되어주는 과정을 친근하게 보여준다. 즉 수화의 영역을 넓힌 것이다. 추리극 밑바탕엔 기득권층의 낡은 정치적 야심이 깔려 있지만 미혼모 아래 발달장애아, 심지어 스스로 가족에서 이탈해 버린 한 남자의 아픈 운명까지 등장시키며 이래저래 소외된 자들을 하나하나 포용해간다.

 

전편에서 아라이의 법정 통역사다운 면모가 약했었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그 역할을 다한다. 같은 농인들을 등쳐먹던 피의자의 양심을 끌어낸 것이다. 바람의 소리를 기억했던 한 남자는 오래전 그 소리를 잊지 못한 채 세상의 소음과 단절돼 버린다. 그는 상실감을 극복하기보다는 자신의 소리안에 갇혀 버린다. 내면의 소리까지 잊어버렸던 한 남자에게 던진 한 마디가 꽤 인상 깊게 남았다.

언제까지고 바람 속에서 혼자 서 있을 생각이로군. -p.199​

 

<용의 귀를 너에게>는 범죄의 실마리와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달장애가 가지는 특수성을 이용해 사건을 풀어가는 점이 흥미롭다. 교육의 진정한 목표뿐 아니라 농인 학교와 같은 특수학교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고 가족이라는 표면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던 아라이와 범죄로 인해 불안정해져버린 루미를 보며 가족의 의미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세 번째 시리즈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에서는 어느덧 세월이 훌쩍 지난다. 아라이는 드디어 가정을 이루었고 선택한 통역사의 삶도 안정돼 보인다. 두 번째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단편으로 엮여 있지만 아라이의 삶을 중심으로 농인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과 불공정한 사회의 이면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통역 역시 특정 분야의 지식이 없으면 난감하고 다루는 수화 체계가 다르면 아무리 통역사가 있다 한들 무용지물이다. 좌약이라는 단어조차 제대로 전달이 안되어 앉아서 약을 먹었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여럿 발생하는 것이다. 의료나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게 '말이 통하는 누군가'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말이 통하게끔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장애아는 줄여야만 하는 거래.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거" -p.141​

SF 소설을 보면 가까운 미래에는 장애 정도는 얼마든지 고치는게 가능하다. 장애가 있는 인간이 줄어드는 세상이 아닌 없는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줄이는 게 대안이 아니다. 장애를 가진 이들과 어떻게 하면 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을지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는 수화가 아닌 수어라는 표현이 맞는 표현이라고 한다. 수어도 또 하나의 언어로 인정받은 것이다. 사용하는 언어체계가 다르다고 편이 나뉘어서야 되겠는가. 그만큼 소통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아라이는 우려했던 대로 태어난 딸이 '들리지 않는 아이'다. 여전히 모든것들이 미흡하지만 미유키가 느낄 심리적 동요, 사춘기 미와를 지나게 될 소외감, 딸이 성장 후 노동 현장에서 겪어야 될 불편함들이 여느 우리네 성장통과 크게 다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진짜 장애는 장애를 가진자가 아니라 장애에 대해 편견을 지닌 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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