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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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은 맛있다. 이처럼 소화력 좋고 기분 좋은 두드림을 준 책을 만나 반갑다. 천선란 작가의 이전 단편들이 신선한 바람이었다면 천 개의 파랑은 오월의 바람과 참으로 잘 어울린다.

한국과학문학상이 있는 줄도 몰랐다. SF란 장르를 좋아하지만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다. 주로 외국 작가의 책을 찾아읽다 작년부터 하나 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만나고 있다. 정세랑, 김초엽, 그리고 천선란. 어쩜 이리도 간이 딱 맞을까.

 

천선란 작가에게 대상을 거머쥐게 한 천 개의 파랑은 SF와 문학의 조화가 돋보인다. 기계문명의 등장은 인간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지만 인간의 감성에 물기를 앗아갔다. 생명체를 향한 다정했던 시선은 돈과 쾌락에 혐오스러운 비정함으로 뒤바뀐다. 시대의 흐름에 적당히 어울리지 못하면 야유와 깡통이 날아든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에겐 과학문명과 더불어 문학이란 코드가 들러붙어 있어야 한다. 마치 스카치테이프로 퉁퉁 말아놓은 덤처럼. 그렇게라도 해 놓지 않으면 사막과도 같은 미래의 모습에 암담함을 느끼지 않을까.

 

작가는 휴대폰 메모장에 끄적여놓았던 한 문장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경마가 등장하고 기술 문명인 로봇이 등장한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시점으로 놓고 기수였던 로봇 C-27(기계)과 경마 투데이(동물), C-27에게 콜리라는 이름을 주며 제2의 삶을 선사한 연재(인간)를 등장시킨다. 이 삼박자를 아름다운 관계로 만들어준 요소와 주변 인물들의 배려까지 더해져 뭉클한 휴먼 드라마를 탄생시킨다.

 

우리는 오늘을 산다. 로봇에게도 오늘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만는 기수 로봇으로 만들어진 콜리는 인간의 실수로 오늘을 사는 것만 같다. 분명 학습된 감정체계로 인식해야 함에도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듯하다. 바람에 흩날리던 투데이의 갈기를 만지고 싶어하고 변화하는 하늘빛에 입력된 천 개의 단어를 이리저리 조합해본다. 심지어 가짜가 아닌 진짜 초원을 달리고 싶어 한다. 로봇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모습과 흡사하다. 작가는 이 로봇의 능력을 어느 선까지 두어야 할지 조심스럽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하늘은 파랗고 사과는 빨갛고 구름이 꼭 하얀 것만은 아니다. 천천히 살다 보면 놓치고 살았던 것들이 보이는 법이다. 콜리는 천 개의 단어를 천 개 이상의 단어로 불려가는 삶을 산다. 상대의 행동을 분석하는 이유 또한 이해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천 개의 단어를 알아도 쓰지 않는 단어들이 더 많고 이해조차 포기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연재가 경로에서 이탈한 후 제자리를 찾기까지, 보경이 상실 후 멈춰버렸던 시간을 찾으려 하기까지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아질 것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 p.83​

 

기계문명의 단점이라면 모든 것들이 쓸모없는 기계처럼 취급되어간다는 것이다.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삶보다 더 상처가 되는 것은 무관심 속에 버려지는 것이다. 연재는 콜리뿐 아니라 안락사를 앞둔 투데이에게도 시간을 벌어준다. 버려진 시간이 아닌 다시 주어진 시간 속에서 얼마든지 인생의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명이 발달이 인간의 삶을 반질반질하게 하는 동안 삶의 격차는 더욱 거칠게 만들어 놓는다. 빈부의 틈이 더 잔인하게 찢어진다. 때때로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과정은 폭력적이었다.-p.113 동시에 인간미도 찢긴다. 그럼에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건 소수의 꿈틀거림 때문이다. 막연한 미래를 예견하기보다는 상처를 입은 이들을 살피려는 것이 가까운 미래를 돌보는 일이 아닐까. 진정 살려내고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이 삐뚤어진 세상을 바로잡아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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