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파이 이야기>는 몇 년 전 영화를 본 후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화의 여운이 너무 길어서 책을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해놓구선 작가의 다른 책을 먼저 읽었다. 얀 마텔. <파이 이야기> 이후 15년 만에 내놓았다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내겐 신선함과 충격 그 자체였다. 종교와 철학, 삶과 죽음, 인간과 동물이 오묘하게 뒤섞인 환상과 현실의 야릇한 궁합. 나의 모자란 상상력을 쥐어짜내면서도 작가의 문장들에 매료되어 몇 번이고 곱씹어 읽은 기억이 있다. 순서가 뒤바뀌긴 했어도 어찌 되었든 얀 마텔의 느낌을 만끽해서였을까. 책을 읽는 내내 그 느낌들이 되살아났다.

 

<파이 이야기>는 책보다 영화를 먼저 본 이들이 많을 것이다. CG의 놀라운 기술력에 무섭고 두려워야 할 태평양의 밤바다와 밤하늘에 대한 기억은 온통 반짝이는 것들로 각인되어 있고 무심하게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버린 호랑이의 뒤태 또한 오래도록 남아 있다. 완독하고 보니 영화는 원작에 충실했다. 1부에서 종교와 동물 이야기를 읽고 있을 땐 영화를 먼저 본 걸 후회했다가 2부에서 본격적으로 바다 표류기가 시작되었을 땐 영화 이미지라도 떠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으니까.

 

1부는 의외의 즐거움을 주었다. 동물과 종교에 관한 견해에 다시 눈이 띈다. 어쩌면 1부는 2부의 이해를 돕기 위한(호랑이와의 생존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에 대한) 밑밥이다. 그렇기에 1부를 잘 읽어둬야 한다. 생존을 위한 이론 공부랄까. 동물의 특성, 습성, 영역, 서열, 동물을 다루는 방법, 동물과의 안전거리 및 동물이라는 동반자?에 대한 소중함까지. 물론 동물은 동물일 뿐이라는 교훈을 던져 주며 리처드 파커의 무심함에 가슴이 삐걱이기도 했지만.

종교 또한 비껴갈 수 없다. 어쩌면 예측할 수 없는 삶을 헤쳐나가기 위해선 모든 신이 총동원되어도 될까 말까다. 파이는 그저 신을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다. 예수님, 마리아님, 마호메트님, 비슈누님 그 외 온갖 만물의 신들에게 기도하고 의지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했다. 그저 그뿐이었다.

힌두교도들도 사랑에 용량에 있어서는 대머리 기독교 들과 같다고. 이슬람교도들이 모든 사물에서 신을 보는 방식이 수염 난 흰두교도와 같고, 기독교들이 신에게 헌신하는 마음은 모자를 쓴 이슬람교도와 같은 것 아니겠냐고 -p.70​

 

피신 몰리토 파텔, 파이 파텔, 과학자들이 우주를 이해하는 데 사용한 신비로운 숫자 '파이'​

열여섯 살 파이는 모든 신을 사랑하고 동물에 대한 경이로움을 아는 소년이었다. 동물원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1970년대 인도의 혼란기를 피해 캐나다행을 감행한다. 하지만 원인 모를 이유로 배는 침몰하고 구명보트에 덩그러니 남겨진 건 파이와 얼룩말과 하이에나와 오랑우탄과 서기의 실수로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을 가진 호랑이뿐이었다. 그도 잠시 곧 서열이 정해지고 파이와 리처드 파커만 남는다. 주위엔 상어 지느러미가 유유히 떠다니고.

 

그렇다. 그의 인생이 이제 작은 생존 보트 한 척 안에 달렸다. 닻도 키도 없이 오로지 주변 환경의 뜻대로 내몰린 처지가 된다. 보트 안에서 남은 것이라곤 생존에 대한 절박함으로 인한 살려는 의지뿐이다. 호랑이로부터 상어로부터 풍랑으로부터 그리고 굶주림으로부터.

그러나 차차 새로운 의지가 생겨난다. 리처드 파커 길들이기. 길들인 후 함께 하기. 그것이 바로 진정 살고자 하는 의지가 된다.

마음 한편에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p.207​

 

열여섯의 순진한 소년은 생존법칙을 준수했고 게으른 기대감을 떨치고 현재에 집중한다. 터지는 눈물에 지쳐 있을 수만은 없었다. 처음 해 본 살생의 흐느낌이 자신감으로 뒤바뀐 후부터 227일간의 일과는 바쁘게 흘러갔다. 기도는 빼놓지 않는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려 들 때마다 나름의 방법을 쓰며 의지한다. 터번은 신의 모자(언제나 올이 줄줄 풀렸다), 바지는 신의 의복(산산조각이 났다), 리처드 파커는 신의 고양이(계속 위험스러운 존재였다), 구명보트는 신의 방주(감옥이었다), 양손을 쫙 펼친 곳은 신의 땅(천천히 날 죽이고 있었다), 하늘은 신의 귀(잘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라고 되새기면서. 펜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일기도 쓴다. 그럴수록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만으로는 인생을 헤쳐나갈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자 그것 또한 살아가는 방식이었을 뿐이다.

 

여러 가지의 하늘과 바다를 보았고 온갖 밤과 달을 보았다. 최악의 권태와 공포를 맛보았고 영양실조로 눈이 멀어버렸을 땐 앞날이 깜깜해진다. 식인섬의 존재 역시 뜻하는 바가 있다. 살면서 우리는 식인섬같은 인간이나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땐 재빠르게 관계를 끊고 발을 빼야 한다는 점이다. 망망대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파이에게 리처드 파커는 희망이었다. '난 죽는다'가 마지막 일기였지만 운명의 신은 그와 리처드 파커까지 살려 주었다. 호랑이와 함께 한 그의 생존기는 굉장하고 흥미로운 사연이지만 현실에 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이는 다른 버전의 리얼 생존기를 들려준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이고도 끔찍한.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을 두고 잠시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리처드 파커와 함께 한 그 시간들을 믿고 싶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죠.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p.375

나 또한 그들이 짓고 있는 다채로운 표정들을 믿는다. 세상을 아름답게 해 주는 묘하고 섬세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동물들의 표정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정말로 사랑해'라는 파이의 말이 진심이란걸 나또한 누구보다 잘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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