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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의 심리학 - 서운한 엄마, 지긋지긋한 딸의 숨겨진 이야기
클라우디아 하르만 지음, 장혜경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3월
평점 :
품절

올초에 본 영화가 있다. <레이디 버드>는 10대 소녀의 성장기를 그리고 있지만 삐걱대는 엄마와 딸의 모습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모녀는 달리는 차 안에서 <분노의 포도> 낭독 테잎을 함께 들으며 감상에 젖는다. 그러다가 어느새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화가 난 딸은 그만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이 정도면 얼마나 갈등이 심한지 더 말 안 해도 느낄 것이다.
작년에 읽었던 단편도 떠올랐다. 메이브 빈치의 <체스트넛 스트리트_돌리의 어머니>에서는 상반되는 모녀관계가 등장한다. 책에도 이런 어머니가 언급되어 있다. 아름답고 주변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던 엄마의 그늘에 가려진 딸. 그랬던 딸은 자신의 생일에 엄마의 이중생활(바람)을 목격하게 된다.
이렇듯 영화나 책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순간들을 들여다볼 수 있어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딸과 엄마라는 이중 역할 속에서 덕분에 먼지처럼 쌓여 온 그간의 고민이나 문제점들 또한 잘 털어내왔다. 그럼에도 이 책에 눈길이 간 건 사춘기에 진입한 딸아이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난 대단한 착각을 한 채로 쭉 같은 행동을 반복했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큰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그동안 나의 행동이 딸아이에게 어떻게 비쳤을지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무조건 옳다는 교만과 언제나 내가 옳아야 된다는 부담과 사랑으로 포장한 간섭을 행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 말이다.
이 책은 개정판이다. 엄마와 딸과의 문제가 문명이 발달하고 세상이 달라진다고 해서 문제의 근본이 변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전쟁의 트라우마나 가난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별개의 사례가 아닐 것이다. 상처와 그 상처로 인한 감정의 골은 다른 형태로 유사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엄마도 사람이다'라는 명제가 당연함에도 나 또한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 사십 년이 걸렸다. 딸아이에게 초점을 맞춰 읽기 시작했지만 오래전 엄마와 나와의 관계, 아빠와 엄마와의 관계까지 머릿속에 있던 과거의 조각들이 하나 둘 스쳐갔다. 나 또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한 적도 있고 훌륭한 엄마가 되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나는 여전히 엄마라는 역할이 힘들고 때론 내 인생이 더 중하다며 이기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명제 때문에 위안을 얻는다. 어쩌면 이 책의 역할은 관계를 치유하고 위로를 주는 데 있겠다.
중반쯤 읽는 동안 인간은 정말 감정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뼈져리게 공감했다. 심지어 너무나 연약하고 여리다. 애정과 사랑이 조금만 모자라거나 넘쳐도 흔들리고 부서지는 존재다. 인생 초기 경험이 남기는 두뇌의 흔적은 우리 삶의 전반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부정적 단어(결핍, 불평, 한탄, 고통, 갈등, 소외, 거절, 배척, 비난, 냉정, 고독, 자괴감, 방임, 학대, 무시, 멸시, 단절, 변덕)가 월등히 많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에 제대로 된 이성과 공감이 발휘된다면 얼마든지 긍정적 단어(지지, 관심, 안정, 수용, 사랑, 존중, 공감, 이해, 호의)를 더 많이 지닌 채 살아갈 수 있다.
책에는 다양한 인터뷰와 사례가 등장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아선호사상에 상처를 입은 경우와
첫째라서 짊어진 삶의 무게 때문에 관계가 틀어진 사례는 충분히 공감할 이야기들이었다. 애착에도 여러 형태가 있고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딸이 엄마의 인생사를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엄마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고 엄마 또한 딸의 인격을 존중하며 대해야 한다. 그보다 더한 상처를 떠안고 살아왔다면 세상과 타인을 향한 비난과 원망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이해하면서 결핍을 애도하고 채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바라던 경험을 못했다는 사실 또한 애도해야 합니다. -p.116
읽어보길 잘 했다. 엄마의 인생을 존중하고 내 딸의 인생을 배려하고 그리고 내 인생을 토닥여주며 잘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