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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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신화에 관심이 없었다. 이솝이야기나 동화는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그리스 로마 신화까지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신화하면 왠지 종교적 색채가 짙을 것 같고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 이야기에 그닥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림은 좋아하지만 고전 작품 속 신화를 볼 때는 솔직히 별 감흥 없이 지나치는 편이기도 했다.

 

독서 모임 덕에 <키르케>를 읽지 않았다면 <아킬레우스의 노래>도 오래도록 책장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이벤트 당첨 선물도 서로 받은 책이라 더더욱. 물론 이 작가의 전작인지도 몰랐다.

말했다시피 그닥 기대 없이 펼쳤다. 일단 신화의 신자도 모르니까.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맘 편히 고전 동화처럼 읽었다. 미운 오리 새끼도 떠오르고 라푼젤도 떠오르고. 신이 아닌 신과 인간의 중간쯤인 마녀 이야기라 더 신선하기도 했다.

물론 이름 암기가 걸림돌이 되긴 했지만 가계도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제일 헷갈렸던 건 오디세우스의 두 아들 이름뿐. 그 시대에 돌림자라니^^

 

키르케는 그닥 주목받지 못하는 신으로 태어났다. 외모도, 눈빛도, 어떠한 능력도 없는 지나치게 평범해서 볼품없는 신. 그런 이유로 그녀는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찬밥 신세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조롱과 모욕은 기본이고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취급받는다. 그럼에도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일말의 자존심이 있었고 그래서 다행이었다. -p.110

 

결국 그녀는 외롭게 신들 세상을 겉돌다가 인간 세상을 찾는다. 그곳에서 만난 인간 남자에게 애정을 품고 그를 신으로 변신시켜 영원히 함께하고자 했으나 인간 남자가 그렇듯 딴 곳으로 눈이 돌아간다. 첫사랑의 고통은 그녀에게 강한 질투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녀는 신비의 약초를 이용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아무도 몰랐던 그녀의 정체가 드러난다.

파르마키스, 마녀라는 사실.

 

키르케는 마법을 멋대로 쓴 대가로 벌을 받는다. 그녀의 능력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더 힘이 실리긴 하지만. 암튼 뭐 엄청난 벌인 줄 알았더니 지중해 외딴섬에 영원히 혼자 살아야 한단다. 나도 같이 갇히고 싶다. 딱 한 달만. 책 싸 들고. 엉뚱한 생각이지만 아빠가 그녀를 무인도로 보낸 건 좀 진지하게 마법 연구나 하라고 보낸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했다. 어찌 되었든 더 이상의 빈정거리는 소음이 차단된 곳에서 그녀는 독학하느라 진지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키르케가 여성의 이야기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신들에 묻혀 한 줄로 끝나버릴 인물을 살려냈다는 점. 그리고 나처럼 신화를 전혀 모르는 이들의 호감도를 끌어낸 점은 인정할만하다. 한 여인의 성장기로도 충분히 전달력이 있다.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이들을 만나며 느낀 동질감. 특히 육아전쟁은 신이나 인간이나 어쩜 그리 중노동인건지.ㅎ 하지만 남자없인 안되는 거였나? 남자와 함께 해피엔딩이라니. 내가 너무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캐릭터를 원했었나보다.

 

불우한 성장기, 첫사랑의 배신, 게다가 인간남자들의 일그러진 욕정앞에서 자꾸만 마녀의 본성(사악함)이 눈을 뜨려 하지만 그녀는 줄이 하나뿐인 하프에 낼 줄 아는 음이라고는 자기자신뿐. -p.470인 이기적인 신들보다 좀 더 인간적인 면모에 가깝고자 했다. 때론 형제들을 그리워했고(여동생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았다) 인간을 시험했고(처음부터 사악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질투의 대가로 괴물이 된 스킬라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녀 때문에 죽어간 인간들을 위한 죄책감까지도.

 

이런 그녀가 어딜 봐서 신에 가깝단 말인가. 그녀는 사랑이 그리웠고 사람이 그리웠다. 오디세우스와 한 달 정도 지내는 동안 그녀는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가 떠날 때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아들을 위해 무리하게 쳐 둔 실드 때문에 오디세우스가 죽었다고 자책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신들이 말하는 운명론을 맹신하고 노력조차 놓아버린다면 그것 또한 재미없을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운명을 거슬러 더 나은 방법을 찾고자 했다. 통하는 마법이란 좋은 재료보다 그 마법을 향한 진정성이니까.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신 아테나로부터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섬에 마법을 건 것도 모자라 과잉보호를 한다. 세상의 사악함과 추함만을 알린 라푼젤의 엄마와는 다르게 세상의 아름다움만을 가르치고자 했지만 아들의 호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식 교육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ㅋ

 

철떡 같이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성향을 닮았다고 여겼건만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결정적 증언을 한다. 당신의 아들은 당신을 쏙 빼닮았다고.

부모도 자식과 함께 성장한다고 하듯 텔레고노스의 모험심은 그녀를 다시 깨운다. 유배를 풀기 위해 이번에야말로 아버지와 제대로 된 한판 승부를 벌이는데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찌릿한다.

그냥 제 마음대로 살 테니까 앞으로 자식을 꼽을 때 저는 빼주세요. -p.470

 

태어날 때부터 걸맞은 이름이 없어 키르케가 된 키르케.

이름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는 인간들은 맘에 들지 않으면 개명도 한다던데 키르케는 키르케답게 자신의 삶의 영역을 잘 일구어 나간다. 행운에 감사하고 불운에 어떻게든 또 맞서기 위해 뭔가를 준비한다. 그녀는 누구보다 인내했다. 때론 감내하고 때론 맞서며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갔다. 혼자여서 외로웠고 아팠고 아픔을 공유했고 다른 이의 경험을 통해 사악함을 내려놓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인내심을 다져가고 페넬로페를 만난 후 따스함을 배워간다.

 

페넬로페와 그녀의 아들 이야기를 읽다 보니 페넬로피아드를 읽었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 책도 재독을 해야겠구나. 아이들 읽히기 위해 들였던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 전집도 독파 계획에 넣었다. 권장도서 0순위라고.ㅋ 신화를 보면 다양한 인간사가 보인다. 신화는 해석하는 이들에 따라 같은 캐릭터라도 이미지가 달라진다고 하는데 <아킬레우스의 노래>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도 궁금하다. 신화를 알고 나면 예술 작품도 달리 보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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