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진심으로 엮일 때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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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마지막. 이상하게도 존치버 단편집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토란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걸까. 그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고 작가님의 다른 책에 손을 뻗었다. 어쩌면 외쿡!정서보다 우리네 정서가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진심으로 엮일 때라는 말의 의미도 뭉클하지만 표지 그림 속 그녀의 질끈 묶은 머리끈으로 자꾸만 시선이 고정된다. 가닥가닥 흩어진 관계들. 한치 건너 또 한치 건너 이어져 있는 관계들. 그런 관계들이 서로 엮여 들려고 할 때 생기는 다양한 심리들. 아마 대충 그런 이야기들이 아닐까 짐작해보며 시작했다.

 

아직까지 나는 정체가 의심스러운 사람은 만나본 적은 없다. 간혹 개명한 사람이 주위에 한둘 있긴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었다. <리플리 부인>과 <마리나 나의 마리나>에 등장하는 여인은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많다. 그런 사람과 얽혀 있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지속적인 의심을 품게 만든다.

 

의류 매장을 전전하다 지방 의류매장으로 이직을 한 여자는 <리플리 부인>이라 불리는 사장의 정체에 의심을 품는다. 그녀가 자랑하듯 떠벌리는 과거와 짝퉁 옷을 라벨갈이 하며 고객을 속이는 모습에서 그녀의 과장된 과거와 거짓된 삶을 의심한다.

정복순. 정하연. 정혜경. 리플리 부인.

그녀는 그녀의 이름이 바뀔 때마다 내버린 인생과 숨겨둔 자아를 늘려갔고 여자는 그런 그녀를 자신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 한심하게도 자신의 이름마저 내버리고 온갖 고생 끝에 선택하려는 종착지가 돈 많고 명 짧은 영감이라니. 싼티난다고 해야 하나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 온통 거짓뿐인 그녀의 삶에 진저리를 느끼며 다시 가방을 싼 여자는 계속되는 의문이 자신을 누르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진실 따윈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병신처럼 당하지 말라던 선임 직원의 말이 낳은 파동이 워낙에 강력하니까.

 

순수하고 청아하게 태어난 인간은 일생을 사는 동안 자신이 지닌 눈부신 빚덩어리를 힘껏 훼손하기만 하다가 결국 유해한 존재로 세상과 작별한다. -p.64

 

<마리나 나의 마리나>편의 영숙씨는 그런 믿음을 더욱 뒤흔들어 놓은 인물이다. 사람을 믿는 근간은 무엇일까. 그들의 관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믿음의 방향이 변화는 과정을 보게 된다. 민자씨에게 영숙씨는 그저 안으로 조여진 느낌이 없는 선명하지 않은 사람일 뿐이었으나 민자씨 딸에게는 눈빛부터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의심의 폭은 돈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금전적으로 얽히지만 않았어도 영숙씨는 그저 괜찮은 이웃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도움을 주던 외삼촌마저도 돈 앞에 계산적으로 돌변하지 않았던가.

 

<돈의 수사학>도 돈이 문제다. 아래층 집 도배하는 소리를 돈 세는 소리로 들은 조. 그는 돈을 귀하게 여기라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여태 받들며 살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로서는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이 집의 가정사가 외손자의 한 마디로 귀결되버렸다. 영감, 존나 기 빨리게 하더니....

돈돈했던 아버지는 딸들에게는 원망스러운 돈줄이고 그런 관계를 지켜본 외손자 또한 마찬가지다. 자식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는 딸의 논리는 그 집안만의 법인가. 돈의 귀함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 조가 딸들에게도 다른 방식으로 이해시킨 것 같아 씁쓸했다. 노년이 외로운 사람은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과 나누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거래요. -p.133 라는 말이 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면 백 프로 공감했을 것이다.

 

 

 

 

<천사는 이렇게 탄생한다>와 <우리가 진심으로 엮일 때>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전쟁통에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할아버지와 얽히게 된 은주의 이야기이다. 할아버지는 사람을 찾기 위해 은주네 회사를 방문했고 몇 번의 만남 속에서 은주는 알 수 없는 연민에 사로잡힌다. 이 두 가지의 질문이 은주의 심경을 자극했을는지도.

흐르지 않는 시간에 갇혀 있다면 서은주씨는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p.170

모든 기억을 깡그리 잃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가씨는 어떤 선택을 하시겠소. -p.186

 

양념한 가지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은주네 집은 성실하지 못한 엄마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색깔별로 슬리퍼를 사는 엄마를 은주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사연을 들으며 어떤 공통점을 발견한다. 오로지 홀로 견디고 구축하며 삶의 불가능에 맞서왔다는 점은 은주의 나면 속 천사의 얼굴을 흔들어 깨운다. 할아버지에게 가족이란 단어를 연상하게 해 준 선물을 하면서도 그냥 무언가에 살짝 미쳤었다고 생각했었지만 은주도 할아버지도 서로 첫눈에 알아본 건 상실감의 눈빛이었다. 그 빈틈을 채워주고 싶었던 마음이 은주의 혈관에 흘러들어 진심이라는 연결고리로 엮은 것이다.

 

별사탕 한 알을 입안에 던져 넣고 이리저리 굴려가며 단물을 빼내는 동안 믿음과 진심이란 단어에 얽힌 관계의 의미를 굴려 보았다.

우리는 사람을 향한 믿음의 뿌리를 어디에 둬야 하고 무얼 근거로 그 믿음을 다져야 할까. 눈빛이 선하지 못함을 끝까지 의심해야 할지, 얼굴선의 선명하지 못함을 의심해야 할지, 관계의 시간 속에서 흐려진 의심을 믿어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애매한 건 돋보기를 들이댈수록 거짓이 확대되어 보이는 자보다 믿음의 조직이 성글어져 보이는 자다. 사람 보는 눈을 기르는데 경험밖에 답이 없는 것일까. 하긴 진심이라는 것 또한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니까.

 

작가님의 글은 익숙한 지명이 등장하고 역사적 사건 속에서 파생된 이야기 때문에 친근하기도 하지만 가끔 군침도 돌게 한다. 조기의 연한 살점을 고사리로 휘감아 먹는 고사리 조기찜은 어떤 맛일까.

아쉬운 마음에 남은 별사탕 세 개를 마저 털어 넣었다.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님은 이해하지 못할 악인을 쓰는 게 꿈이라고 하셨다. 캐릭터를 자꾸만 이해하려 들어서 선과 악의 경계가 자꾸 모호해진다고. 그 말씀을 들으니 사이코 패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책에 가졌던 의문이 조금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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