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옛이야기의 힘 - 대담하고 자유로운 스토리의 원형을 찾아서
신동흔 지음 / 나무의철학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시절 계몽사에서 나온 어린이 세계명작동화를 즐겨 보았었다. 물론 책장에 꽂혀 있는 몇 권 되지 않는 책이기도 했지만 유독 다른 책보다 세계명작을 좋아했다. 동화에 동화되어 철저하게 권선징악의 논리를 의심하지 않았던 시절, 종이 인형놀이를 할 때만큼은 서로 신데렐라와 백설공주가 되겠다고 친구들과 싸우기도 했다. 그녀들은 아름다웠으며 갖은 구박과 고난 따위에도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었으니까. 그렇듯 갖가지 이야기들 속에서 얻은 온갖 교훈들이 진리인 것처럼 믿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이 명작동화의 결말처럼 되기에는 복잡하고 변수가 많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렇듯 나는 구전 이야기의 힘을 의심해왔다.
각종 설화나 우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야기의 원형에서 닮은 구석이 많다. 인간들이 추구하던 선과 배척하던 악의 근원이 비슷하다는 얘기다. 심지어 놀랍게도 마치 표절한 것처럼 흡사한 얘기들도 있어 신기할 정도다.(네이버 지식IN에 보면 표절이냐는 질문도 있다.ㅋ) 대체적으로 옛이야기들에서 볼 수 있는 공식이라면 착하고 정직해야 복을 받고 이기적이고 욕심부리고 남을 해코지하면 벌받습니다, 이러이러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맺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야기가 죄다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한정된 이야기 주머니안에서였음을 이 책을 통해 드러났다.
저자는 10여 년 전 <그림형제 민담집>을 펼쳤다가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야기에서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자 이야기가 다시 보였고 그렇듯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파고들어가자 그야말로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엄청난 이야기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 순간 여태껏 내가 읽어왔던 이야기들 속에서 지나치거나 간과한 대목이 무수히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이 스쳤다. 옛이야기에서 뽑아낸 통찰력에 감탄은 당연하거니와 동시에 자괴감도 들었다. 난 왜 이렇게 독서를 못할까 하고.^^ 난 원래 이야기를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재주가 없다. 통찰력이 부족한 건 그만큼 깊이 사유하는 걸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와 그의 학생들이 내놓은 다양한 관점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책은 두껍지만 다양한 민담을 만나볼 수 있어 내겐 정말 뜻깊은 독서가 되었다.

대체적으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행동과 배경은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빨간 모자의 사냥꾼은 냉철한 이성으로, 마녀의 흉하게 묘사된 형상은 노인을 비하하기 위해서가 아닌 사회의 낡은 관습과 억압이 얼마나 흉측한지를, 난쟁이처럼 작고 비루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존재가 실로 커다란 능력자로 보이기도 한다. 마법에 걸려 동물로 변하는 존재들은 관계로 인한 상처를 짐작해볼 수 있고 주인공의 험난한 시간은 인생이 그만큼 힘듦을 시사한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마는 사회적 폭력으로, 숲은 세상 또는 사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들은 단순해서 의미가 금방 전달되는 반면 뒤죽박죽 얽혀 있어 생뚱맞거나 이해가 안 되는 것들도 있지만 풀이를 해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의 힘을 믿어야 한다. 이야기의 원형이 비슷해도 주인공의 작은 행동하나에 결이 달리 지듯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다채로워야 인생을 다각도로 볼 수 있다.
역시 이야기는 원형 그대로 읽어야 제맛임을 알았다. 이야기를 사랑한다면 개구리 왕자의 반전, 라푼젤의 원뜻, 콩쥐팥쥐의 뒷이야기를 보는 재미도 있지만 민담집에 수록된 신선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에 흠뻑 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끼는 책인 <어린이 세계의 명작>을 다시 꺼내 이야기의 힘이 무엇인지 제대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