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바람의 그림자 1~2 - 전2권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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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짧다. 늘 그렇듯 이번 가을도 책에 집중을 못 하고 있다. 대신 영화로 마음의 양식을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책의 말미에 다다르니 슬쩍 찔리기도 한다. 오랜 시간을 버텨온 서점의 자리가 위협을 받는 모습이나 위대한 독서가는 날로 줄어만 간다며 걱정하는 베아를 보며 정신 차리자 싶었다.

 

책을 고를 때 표지에 끌려 구입하는 책이 많은데 이 책도 그런 이유로 들인 책이다. 구입내역을 보니 2018년 4월에 들였다. 우와~~ 그동안 뭘 한 거야. ᄏ

얼마 전에 두 권으로 분리되어 있던 이 책의 특별 합체본이 나왔다. 아마도 작가의 타계 때문이기도 한듯하고. 그래서 잠자던 책을 깨웠다.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서 깨우듯이.

 

책을 읽기 전 영화 <나이브스 아웃>을 보았다. 1권을 읽는 내내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하다. 탐정놀이하듯 과거의 퍼즐 조각을 맞춰가는 모양새가 말이다. 그래서 뭐 나쁘진 않았다. 적당히 미스터리하고 드라마틱 하니까. 조금 불편한 설정조차 그 나라 그 시대의 관념과 세태려니 하고 넘기며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빠져 보았다. 덕분에 진도 빼는데 힘들진 않았으나 갑자기 이야기의 힘이 빠지는 순간을 만나버렸다. 뭐야! 소리가 절로 나오자 책을 덮고 싶었달까. 일일 아침드라마 원조 막장극 설정이라니.

이 소설이 심사위원들의 손에 들지 못하고 독자들의 손에 더 많이 들린 이유가 이 때문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마치 인생이 충분히 복잡하지 않다는 듯이 자기 삶을 복잡하게 만들려는 경향이 있단다. -p.118

 

참 복잡하다.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과거의 일까지 겹쳐지니 더욱이 복잡하다. 다니엘은 운명처럼 만난 한 권의 책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운명의 책의 저자와 비슷한 운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말이다.

1945년 전쟁과 사상과 권력의 공포가 안개처럼 내려앉은 바르셀로나. 그곳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한 아버지는 10살 난 아들의 손을 잡고 ‘잊힌 책들의 묘지’에서 아들에게 딱 한 권의 책을 고르라고 한다. 책을 양자로 삼으라는 의미는 그만큼 신중히 고르라는 의미다. 다니엘은 그 많은 책의 미로에서 훌리안 카락스가 쓴 <바람의 그림자>를 꺼내 들고는 흥분감에 들뜬다. 하지만 그 한 권의 책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바람 잘 날이 없게 된다.

 

책의 저자는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았고 그의 책은 누군가에 의해 도굴되다시피해서 불태워지고 있었으며 그 책 때문에 다니엘 주변에도 이상한 그림자들이 얼씬거리게 된다. 어쩌면 운명이고 어쩌면 저주일 수도 있다. 매장에 진열돼 있던 만년필을 떠올리면 다니엘과 카락스의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이 단단한듯하고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덮쳤을 땐 분명 이건 저주다 싶었으니까. 며칠 전 선물 받은 만년필이 자꾸만 오버랩된다.

 

한 권의 책으로 시작된 호기심은 삶의 더러운 민낯과 인간의 추악한 욕망의 그늘을 다 보여준다. 사랑과 배신, 거짓과 기만, 증오와 혐오, 이별과 복수 등 온갖 감정들이 난무한다. 훌리안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분노로 얼룩진 슬픈 운명의 서사가 다니엘의 성장기와 맞물려 두 배로 무겁게 다가온다. 그랬기에 다니엘의 멈칫거리는 행동과 피하려고만 하는 모습에서 답답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인물만 놓고 보자면 다니엘의 아버지 같은 인물은 이상적인 인물이고 거지에서 서점 직원으로 신분상승한 페르민은 완전무결 의리파이자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훌리안을 위해 희생한 미켈과 훌리안을 끝까지 사랑으로 지키고 돌보았던 누리아의 희생은 안타깝고 가엽다.

반면 고독한 인물들도 많다. 훌리안의 부모님. 특히 훌리안을 인정하지 않다가 늙어가며 훌리안을 잊지 못하던 아버지, 정신병원을 거쳐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페넬로페의 보모의 삶은 처절하게 삶으로부터 버림받은듯하다.

 

어느 시대나 나라를 등에 업고 악덕한 짓을 맘껏 일삼는 하수인은 있기 마련이다. 푸메로같은 독종은 이야기의 흐름을 더 찰지게 한다. 등장만으로도 더럽게 재수 없고 치졸하고 공포스러우니까. 푸메로는 살인의 이유도 복수의 이유도 하나다. 재미를 위해서. 그의 권력의 크기가 커져갈수록 희열도 커져간다. 자신의 눈앞에서 고통받고 울부짖는 자들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악마다. 그는 훌리안의 주변 인물들뿐 아니라 다니엘까지도 죽이려 한다. 결국 <바람의 그림자>에 등장하는 악마의 그림자에게 처절하게 당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지만 그를 영웅시하는 나라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영 개운치가 않다.ㅎㅎ

 

폭력과 학대에 희생당하거나 희롱당하고 농락당하는 여성들의 삶도 안타깝긴 마찬가지다. 성적 대상으로 그리며 만족감을 표출하는 장면들도 제법 등장해서 불쾌감을 유발한다. 하지만 이 문장으로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다.

당신네 여자들은 마음의 소리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지요. 바보 같은 소리는 덜 듣고.

그래서 여자들이 더 오래 사는 것일 테지. -p.303

오래 산다기보다 여자의 부드러움과 희생이 있었기에 세상의 질서를 붙잡고 있는 게 아닐까. 더 오래 살아 뭣하게.ㅋ

 

그렇게 얽혀있던 이야기를 풀어보겠다고 단단히 집중하다 2부에서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누리아의 글로 이야기의 전말이 다 드러날 줄은. 이 부분도 어쩜 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느낌과 비슷한지. (중간에 범인이 누군지 알려주고 풀어나감.ㅋ)

각본이 잘 짜인 영화 같다고 느낀 이유를 작가의 이력을 보다 찾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광고계에 몸담고 있다가 영화의 세계에 매력을 느껴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미스터리한 책으로 시작하였지만 한 연인의 비극적 사랑이 불러온 참극이 이리도 질기게 이어질 줄이야.

누군가의 욕망은 누군가의 인생을 뒤흔들고 누군가의 분노는 서로의 인생에 저주를 내리며 누군가의 사랑은 누군가를 보호하고 누군가의 희생은 누군가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은 일방적이 아닌 여러 방향으로 다양한 영향을 주며 얽혀있다. 우리가 읽는 책도 마찬가지다. 간접 경험을 통해 영혼의 울림을 느껴본 이들이라면 책과 영혼의 상관관계를 부정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네가 보는 책들, 한 권 한 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단다.

책을 쓴 사람의 영혼과 책을 읽으며 꿈을 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다.

 

휘몰아쳤던 생의 소용돌이의 잔해들이 뒹굴던 곳에서 유사한 생의 경험을 겪으며 성장한 다니엘. 차갑고 어두운 바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던 도심 위로 <안개의 천사>가 도착하고 그는 사랑을 찾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의 손을 잡고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찾아간다. 그의 아들의 영혼을 뒤흔들 책은 어떤 책이 될까.

 

모자라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고, 겁쟁이들은 침묵하며, 현명한 이들은 이야기를 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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