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12년 전 세계 독자들을 덕후로 만든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1908년 6월. <빨강 머리 앤>이 드뎌 세상에 나온 것이다. 1905년 6월 그녀가 "끝에 e가 붙은 앤 Anne으로 불러주세요"라는 고아 소녀를 쓰기 시작한 지 3년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그리고 앤의 고향인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모드와 앤의 일생을 읽고 있는 독자가 있다. 모드의 우울한 말로를 떠올리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앤을 기억하고 사랑해 주는 수많은 독자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다 위안이 된다. 아마도 앤과 관련된 전 세계 출판물을 모두 모아놓으면 큰 대형 도서관 하나 정도는 거뜬히 나오지 않을까.ㅎㅎ
일전에 일본 작가가 쓴 책<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 위즈덤하우스>을 읽은 적이 있다. 앤을 좋아해서 관련 삽화를 그리던 작가였는데 그 책을 통해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에 관한 일화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그 뒤 읽었던 책 <빨간 머리 앤이 사랑한 풍경, 터치아트>에서 실물 사진들을 접하며 에드워드 섬과 작가의 일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을 가졌었다. 이번에 읽은 <하우스 오브 드림>은 몰랐던 작가의 일생을 더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앤과 작품 속 캐릭터들을 한층 더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다. 게다 전기에 등장하던 인물이나 풍경들은 이전에 읽은 책을 넘겨보며 다시 찾아보기도 했는데 코로나 시대에 이런 풍경을 보고 있자니 아주 먼 과거를 마주하고 있는 서글픔이 밀려들기도 한다.


그녀의 삶은 일기장과 편지, 사진, 스크랩북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이만한 훌륭한 기록물이 어디 있을까. 저자는 그런 그녀의 기록물을 모아 전기로 엮어 출판했다.
모드의 초창기 삶을 보면 정말 앤과 많이 닮아 있다. e를 고집한 앤과는 달리 모드는 e를 빼고 싶어 했다는 점만 다를 뿐.
앤은 아기였을 때 부모를 잃었고 모드 또한 아기였을 때 엄마를 잃었다. 자상했던 아빠는 몇 달 뒤 모드를 외조부모에게 맡기고 떠나버린다. 그러한 모드의 환경 때문에 앤은 어딘지 모르게 모드의 내면의 또 다른 자아 같기도 하다. 그녀만의 활발한 상상력, 자연에 대한 열렬한 사랑, 무생물에 이름을 붙이는 습관, 찬장 속 가상의 친구, 책에 대한 끝없는 사랑, 특유의 허영심과 자만함과 고집,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고 꾸준하고 변함없는 애착까지. -p.186
그랬기에 모드는 앤을 마치 실존 인물로 착각했다고 한다. 그것은 앤이 곧 모드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드가 불완전한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데는 아름다운 캐번디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의 상상력은 앤에게 그대로 반영된다. 명랑하고 재밌는 삶, 밝음과 긍정의 전도사이고자 했지만 모드의 삶은 앤처럼 밝고 희망적이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앤처럼 모진 삶의 굴곡이 있었지만 잘 견뎌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냉대는 독자인 나도 참을 수 없을 지경이고 그녀의 남편 또한 무능하고 무심해서 짜증이 난다. 게다 첫째 아들마저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망나니로 자라다니. 출간 뒤 출판사와의 긴 소송 문제는 또 어떻고. 게다가 전쟁의 소용돌이도 지나왔으니 나라도 정신이 온전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앤이 탄생하기까지 외할머니의 경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더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을 것이다. 물론 물질적인 도움만 준 것으로 보이지만. 모드는 교사의 꿈을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낯선 곳에서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그랬기에 늘 영혼이 닮은 이를 갈구했다. 때론 너무 지쳐 구애를 승낙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애인이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등 불안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오죽하면 그녀 자신도 '정신 나간 해'였다고 했을까.
그렇듯 변덕스러운 일상은 모드를 늘 초조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돌아옴으로써 기력을 회복한다.
그랬기에 앤을 쓰기로 결심하기까지의 설렘과 출간이 되기까지의 흥분감과 초조함이 그녀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빛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모드에게 있어 글쓰기란 구출이자 도피이자 구원이자 목적이었다. -p.267
모드는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그 어떤 여성보다 자신에게 열정을 쏟으려 노력했다. 글쓰기는 그녀가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탈출구이자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글 쓰는 자의 숙명이었을까. 앤은 그녀에게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앤의 성공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게 성공의 굴레를 덧씌웠고 이는 다음 작품을 집필하는데 스트레스가 된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 쓰는 일에 매진했다. 남편의 조울증과 첫째 아들의 방탕한 생활, 사랑하는 이의 죽음, 전쟁공포 등으로 그녀는 더욱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도 펜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경험들 중 앤의 이야기의 소재가 된 것들이 제법 있었다. 일어난 모든 일이 그녀의 예술을 위한 소재가 되었다. -176 모드의 첫 낭독회나 무리한 집안일 등도 이야기 속에 넣었으며 길버트가 앤의 머리를 보고 홍당무라고 놀린 장면은 우습게도 실제 모드가 한 남학생을 놀린 것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녀는 삶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진정한 글은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녀의 우울한 결말과는 달리 그녀는 성공한 작가이자 많은 이들의 영혼을 치료해왔다. 글을 쓰는 일은 고독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그만큼 이야기를 들어줄 영혼의 단짝도 필요한 것이다. 모드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 줄 상대가 늘 주변에 있었더라면, 좀 더 일찍 캐번디시로 돌아왔더라면 그녀의 삶은 얼마나 달라져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모드의 마지막 페이지에 쓰인 문장에 가슴이 아프다. “실수도 많았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을 이렇게 끝내야 한다니.”
비록 모드는 삶의 기쁨과 열정을 많이 즐기며 살지는 못한듯하다. 하지만 모드와 앤의 상상력은 수많은 독자들의 삶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야기 소녀'덕분에 우리는 꿈의 집 그곳어딘가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은 절대 가난하지 않아요. 무언가 사랑할 대상이 있다면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