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니코 워커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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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희한하게도 이 책을 읽기 하루 전 영화 <엘라의 계곡>을 보았다. 남편이 채널을 돌리던 중 토미 리 존스와 샤를리즈 테론이 나오길래 하던 일을 멈추고 끝까지 보게 되었다. 아버지(토미 리 존스)는 이라크 파병을 다녀온 아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석연찮은 기운을 감지하여 직접 찾아 나선다. 그렇게 이라크에서 아들의 행적을 쫓던 중 실종된 아들의 토막 난 시체가 발견되는데 군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듯한 분위기에 아버지는 지역 형사 에밀리(샤를리즈 테론)와 함께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실체를 밝혀 낸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게 된다. 어린 병사들이 전쟁으로 인해 미쳐가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퇴역 군인으로 나라에 충성스러운 국민이었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아버지는 전쟁터에 아들을 떠다민 비정한 아버지이자 아들의 트라우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무정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이 영화도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라크 파병의 실체와 전쟁의 참상을 낱낱이 볼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어린 병사들의 두려움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얼마나 무섭고 싫었을까. 임무를 완수하기 전의 공포와 완수한 뒤의 죄책감들을 떨쳐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마약뿐이었고 그러한 반복된 일상이 그들을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전쟁은 인간성이 붕괴되고 해체되어 결국 만신창이로 만든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쟁은 병사들 개개인의 삶 따윈 관심이 없다. 적들을 쳐 부수기만 하면 된다. 그냥 살인 병기인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온 뒤의 삶 따위 더더욱 관심이 없다.

 

'체리(Cherry)’는 미국에서 전쟁에 처음 투입된 군인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어쩌다 이 예쁜 단어가 그런 의미로 쓰이게 되었을까.

영화 <엘라의 계곡>이 다큐 같단 느낌이 있었는데 소설 <체리>는 한 개인의 일기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영화를 먼저 만나본 것이 기가 막힌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개인의 삶을 이해하는데 충분히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책을 괜찮게 보았다면 영화도 강추한다.

 

 

 

 

작가노트에 적힌 세 문장에 마음이 짠해진다. 마치 그의 마지막 바람이었던것만 같아서.

 

한 남자가 군에 자원입대하여 이라크로 파병된다. 하지만 전쟁의 실상은 달랐다. 죽고 죽여여만 하는 곳에서 정신이 멀쩡할 수 없음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평범한 삶을 더 이상 꿈꿀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3부 [체리]편을 읽고 있으면 견딜 수 없는 전쟁터의 실상과 마주하게 된다. 누구든 죽이고 싶어 안달 난 자들이 인간일 리가 없지 않은가. 괴상한 전우애와 멍청한 죽음이 있는 곳에서 모든 사람이 폭력에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지나가는 개를 쏘는 것도 일상이다. 의미 없는 농담, 격한 언쟁, 과한 액션은 견딜 수 없는 전쟁으로 나타나는 징후들이다. 하나둘씩 그렇게 미쳐간다. 그는 위생병임에도 환자들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음에 죄책감을 느낀다. 전우의 처참한 시신들이 곧 전쟁의 민낯이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하나씩 둘씩. 영웅도 없고 전투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냥 보조이고 허울만 좋은 허수아비였다. -p.235

 

차라리 죽었더라면 영웅으로 남았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은 살아남은 자에게 더 가혹한 법이다.

끔찍했던 그곳에서의 시간은 온전히 그가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괜찮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그냥 괜찮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마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점점 마약에 찌들어갈수록 어쩔 수 없는 자신을 받아들인다.

무엇이 자신에게서 아름다움의 미를 뺏어간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이미 통제 수위를 넘어선 삶. 자신도 그런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조금만 노력하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나조차도 내려놓게 된다. 저러고도 죽지 않은 게 용하단 생각뿐.

 

나를 위해 뭐든지 해 줄 것이라 여겼던 여자친구(에밀리)였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단 사실을 인정하며 그녀의 몫까지 챙기며 함께하는 모습은 오히려 순정파다워 보일 지경이다. 어쩌면 그는 괴물이 되려다 말았기에 자신을 망가트리기로 한 것이 아닐까 했다. 오히려 괴물이 되었다면 타인의 삶을 망치는 더한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까. 은행 강도도 참 선량? 하게 저지른다. 보통은 점점 대범해지고 잔인해질 만도 한데 적정선을 지키는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다. 영화에서는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기르던 개를 죽이고 아내까지 죽이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언제나 개자식이었다는 것이다. -p 267

 

니코 워커는 자신이 겪은 일을 진실되게 고백했다.

이라크를 다녀온 이후 얼마나 극심한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헤로인 중독에 빠져 은행강도까지 저지르는 과정이 절로 납득이 될 정도다. 물론 그런 행동이 정당화돼서는 안되겠지만.

 

전쟁과 마약의 공통점이라면 인간성 말살이 아닐까. 영화에서 토미 리 존스가 새로 들어오는 신병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국가는 더 이상 승리와 영광에 도취되어 그러한 희생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싸워서 이기라고, 강해지라고만 강요해서만은 안된다는 얘기다. 국가는 개개인의 삶을 돌볼 의무가 있다.

그는 현재까지도 복역 중이라고 한다. 올해 출소 예정이라고 하는데 진심으로 그의 남은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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