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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양장) - 개정판 ㅣ 새움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년 전에 새움 출판사 블로그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에 관한 글을 본 적 있었다. 오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번역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었던 내용들이라 내겐 참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물론 논쟁도 격렬하게 있었나보다.) 덕분에 고전을 선택할 때 좋은 번역가의 글을 선택하고자 하는 노력도 기울이게 되었다.
이방인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번역이 독자들로 하여금 얼마나 캐릭터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게 되는지, 혹은 소설의 전반적인 기류가 어떻게 달라지게 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어쩌면 이방인처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는 더욱 그럴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을 단순하게 치부해버리면 자칫 무기력하게 살다 살인이나 저지른 놈으로 오인할 수도 있으니까.
그 시시비비는 첫 문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엄마가 죽었다 와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벌써 그 의미가 상당히 달라지게 된다. 주인공의 성격이나 모자 사이를 짐작해볼 수 있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정서 번역가는 돌아가셨다로 번역을 했다. 또한 오늘이라는 시간적 의미가 문장의 어느 위치에 와야 글의 묘미를 살릴 수 있는지도 언급하고 있다. 최대한 의역을 피하고 원문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으며 번역가로서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어 신뢰감이 갔다. 이전에 타 출판사 책을 읽었다면 새움 출판사 번역본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뫼르소는 양로원에서 전보 한 통을 받는다. 엄마의 부고 소식이다.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인즉 엄마의 죽은 날과 전보 일을 혼동한 뫼르소의 착각일 뿐이다. 돌아가신 엄마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양로원을 찾는다. 그는 아들이 아닌 마치 손님 같은 느낌이다. 죽음에 슬퍼하기보다는 낯선 분위기와 침묵이 더 힘들어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갔으면 한다. 그는 일상의 흐름(일하고 주말에 쉬는)이 깨지는 것이 싫고 조금의 변화도 귀찮다.(엄마의 부고를 알리는 일 혹은 상사의 파리행 제안 거절) 죽은 엄마의 얼굴을 굳이 봐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엄마의 나이도 모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엄마의 지인이 살짝 짜증스럽지만 건네는 밀크커피는 달다. 장례가 끝난 다음 날은 해변에서 수영도 하고 여자친구를 만나 유쾌한 시간을 보낸 것도 모자라 코미디 영화도 보고 밤도 보낸다.
이쯤 되면 그의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든다. 그렇다고 그런 그가 어딘가 도덕적 결함이 있는 것 같진 않다. 나는 그가 엄마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고 늙어서 귀찮아한 건 아닐까 했다. 양로원에 간 날 엄마가 내내 울었다고 했고 나중에 엄마는 사람은 무엇에나 결국은 익숙해진다는 말도 아들에게 했기에.
법정에서 엄마를 사랑했냐는 집요한 물음에 사랑했다고(모든 이들과 같이) 증언을 한걸 보면 엄마를 미워한 건 아니다. 단지 그는 추모의 방식이 남들과 달랐을 뿐이다. 평범하게 직장도 잘 다니고 있고 아파트 이웃들에게는 그럭저럭 친절하다. 굳이 해가 될 것 같지 않으면 평판이 나빠도 상대가 원하면 친구도 되고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을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그의 태도는 어딘가 모호하다. 사랑이나 애정의 깊이감은 싱겁고 밍밍하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건 맞다. 거짓을 싫어하고 계산적이지 않고 그냥 감정의 흐름대로 산다.
반면 무신경한 면도 있다. 레몽의 애인(무어인)과 애인의 오빠(아랍인) 사이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레몽의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고 그와 계속 어울린다. 결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휘말리며 인생이 끝장나고 말지만.

하지만 그의 이런 태도는 그가 살인을 저지른 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아무리 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배심원 제도 안에서 법보다 도덕적 관습과 신념이 우선시 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얼마나 인간적이고 도덕적인지를 판가름하게 된다. 한 인간의 됨됨이 이것은 보통 우리가 범죄자를 판단할 때 제일 먼저 보게 되는 조건이다. 그랬기에 뫼르소도 엄마의 죽음 이후 행실이 발목을 잡는다. 내가 배심원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태도, 한방을 쏘고도 확인 사살을 한 듯한 태도는 소시오패스를 의심했다.
변호사는 자신만 믿으면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한다. 감옥에도 대부분이 아랍인이었듯 아랍인 정도야 이겨먹을 수 있다는 논리다. 태양이 아닌 칼 때문이라고 증언했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뫼르소는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증언한다. 그 바람에 변호사는 그의 진술을 배제하고 진행한다. 질문은 오로지 엄마의 매장이 포커스가 되고 증인들의 증언들은 그의 죄목에 살을 덧붙여 나간다. 뫼르소는 냉정하고 무심하고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적대감을 느끼게 된다.
더 이상 출구는 없어 보인다. 단지 햇볕 때문이었다는 진술(구체적 진술은 거부했지만)은 살인의 구체적 동기가 될 수 없다. 그는 매정한 살인마일 뿐이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는 논리에 불운은 해당하지 않는다. 감옥에서 읽은 체코슬로바키아 사건의 경우도 얼마나 황당한가.
그는 단순히 태양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전의 심리상태를 보면 그가 극단적으로 태양과 빛에 민감함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갑작스레 쏟아지는 불빛으로 인해 눈앞이 캄캄해졌다. -p.22
흰 벽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불빛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p.23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p.32
그처럼 온갖 사람들과 빛이 가득한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눈이 피로해졌다. -p.41
그것은 내가 엄마를 묻던 날의 것과 똑같은 햇볕이었고 -p.86
어찌 보면 그는 심리적 공허함이나 삶에 무기력해 보이지만 나름 삶의 안정감은 원했다. 단지 그의 행동들이 인류가 만들어 놓은 삶의 가치관에 어긋나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가 저지른 살인을 불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뫼르소는 법정에서만큼은 철저히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에게 내려진 사형은 그의 죄의 대가가 아닌 이방인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얼굴이 아닐까.
대부분 삶에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자신을 포장하고 그렇게 스스로를 기만하며 산다. 나도 전혀 그렇지 않다고 진언할 자신이 없다. 그랬기에 뫼르소는 부속 사제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대체 신이 무얼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점점 삶의 부조리를 확신한다. 자신에게 불어온 부조리의 바람이 자신의 행적을 지워버릴 것이라는 것을. 그 어떤 행위의 결과도 무의미함을 깨닫자 오히려 자신의 죽음 앞에서만은 당당해지고자 한다.
그의 삶의 태도를 보았을 때 뫼르소를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겠다. 장례식에서 보인 그의 행동을 보며 자신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누군가의 글을 마주하면서 머리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조금 서글픔이 밀려왔다. 무감각한 현대인의 감수성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왜 우리는 죽음이 임박해서야 살아있다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게 되는 것일까. 누군가가 나를 이방인으로 밀어내기 전에 내 삶 안에서만이라도 온전한 나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