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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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훌륭한 인간들이 이곳에 존재하는가!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우냐!

오, 멋진 신세계여 ……

 

 

2540년 드디어 인간은 복제에 제대로 성공한다. 그것도 몇 명이 아닌 수십 명을. 인간은 복제를 통해 철저히 통제된 신세계를 만들어낸다. 더 이상 인간은 인간의 몸에서 태어날 필요가 없다. 유전자를 조작하고 우성과 열성인자를 구별하고 지능과 외모를 정확하게 구분 지어 계획한다. 태어난 후에도 반복적인 세뇌와 자극을 통해 완벽한 피라미드 계급사회를 구축한다. 사람들은 각자 주어진 계급의 틀안에서 아주 만족하며 살아간다. 불행, 절망, 아픔, 고통, 시기, 질투, 불만족, 고독, 우울.. 등의 단어는 이곳에서 쓸모없다. 소마(일종의 마약)만 있다면 그러한 불쾌감은 잊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질병도 없고, 늙지도 않는 완벽한 유토피아다. 하지만 그들에겐 완벽한 세상일는지 몰라도 누군가의 시선에 보면 그들은 단지 멋진 노예일 뿐이다. 그 세상을 계획한 자의.

 

오 신이시여가 아닌 오 포드시여~라는 감탄사를 내뱉는 곳.

이곳 사람들은 포드를 절대적 존재로 인식하고 이런 사회를 만들어 준 것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첫 장면부터 아주 디테일하고 친절하게 이 멋진 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인간이 태어나고 계획되어 주어진 계급의 틀안에 내던져지는지를. 어찌 보면 자유로워 보이지만 지독히도 자유롭지 못한 세계이자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감정으로 원하는 욕구를 충분히 즐기며 행복감을 느끼는 사회이다. 하지만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도 불량품이 있듯 이곳 공장에서 태어난 상위 계급 중에도 불량 인간이 있다. 일명 자아의식이 강한 자들이 그런 불량 인간에 속한다. 그런 인간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격리된다.

 

버나드는 알파 계급이지만 외모는 그렇지 못하다. 분명 어딘가 착오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버나드는 같은 계급장들에게 받았던 멸시와 자기비난의 결과로 나답게 사는데 눈을 떠가고 있었다. 그는 점점 이 신세계에 의문을 갖는다. 그것은 어찌 보면 외모에서 오는 불만족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자꾸만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하다 결국 불쾌감을 떨쳐버리는 게 과연 옳은 일 인가하고 의문을 품게 되자 소마를 거부하기도 한다.

 

레니나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자유분방한 연예를 즐기며 자신의 틀안에서 충분히 즐기며 산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작은 호기심이 생긴다. 야만인 구역을 방문하고 싶어 한 것이다. 야만인 구역이란 평범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다. 출산을 하고 가족이 있으며 신을 믿고 질병과 늙음이 있는 곳 말이다. 레니나는 버나드가 심리학자인 장점을 이용해서 그를 꼬드겨 야만인 보호 구역을 탐험할 계획을 세운다. 버나드의 튀는 성격이 맘에 걸리긴 하지만. 철저한 공동체 사회에서 어느 한 계급이, 또는 한 개인의 일탈은 위험한 것이다. 마치 기계의 작은 부품이 고장 나면 작동이 멈추는 것처럼. 그래서 레니나는 버나드의 그런 행동이 불안하기만 하다.

 

그렇게 야만인 구역에 들어온 레니나와 버나드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말로만 들었던 어머니의 존재, 늙음, 질병, 오물, 제신 등을 보게 되자 혐오감을 감출 수가 없다. 게다가 오래전 실종되었다던 린다와 그녀의 아들 존을 만나게 되는데 린다가 출생을 했다는 사실보다 이미 늙고 뚱뚱해져 버린 그녀의 외모에 경악하게 된다. 버나드는 신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자 하는 마음에 이 둘을 신세계로 데리고 가게 되는데.

 

예상했듯이 존과 린다를 본 신세계 사람들의 반응이 볼만하다. 그들은 마치 끔찍한 병균을 보듯이 한다. 특히 린다의 늙어버린 모습에 구역질을 하고 존이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소름 끼쳐 한다. 존은 멋진 신세계에 대한 기대를 안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행복해하는 사람들 틈에서 불안감을 느끼고 린다가 소마 과다 복용으로 죽자 극도로 흥분하게 된다.

 

어떻게 작가는 1932년에 이런 상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었을까. 우리가 걱정하고 우려하던 일들이 소설 속에서 그려지자 누군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만 같아 소름이 돋는다. 책을 보는 내내 여러 편의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특히 영화 [이퀄스]의 사회가 유독 떠올랐다. 사랑이란 감정을 죄악시하며 감정이 철저히 통제된 사회에서 유전자가 조작되고 불만족 없이 무표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는 이 통제된 사회보다는 더 밝은 곳이다. 소마가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점이라면 과거가 철저히 지워지고 통제되었다는 점이다. [이퀄스]의 주인공들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감정이 생겨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이전 인류의 과거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를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버렸다. 거기엔 책도 마찬가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고전문학이나 인문학 책은 위험한 물건일 뿐이다. 존이 난동을 피우고 통제실로 끌려간 뒤 통제관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이 모든 것이 설명되고 있다. 왜 그들에게 책이 죄악인지를.

 

존은 불행마저도 통제된 이 사회를 인정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불편한 상황에서 갈구하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임을 존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기본 욕구가 배제되고 약에 의존해 행복감을 만들어내는 사회를 미쳤다고 결론 내린다.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배척당하다시피 한 존이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곤 죽음뿐이었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이상향이라는 건 없다. 인간은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 수 없고 누군가의 희생이 있기에 또 다른 누군가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발전한 과학은 이처럼 인간에게 엄청난 비극 사회를 안겨 줄 수도 있음을, 그러한 유토피아를 계획한 것조차 인간의 헛된 욕망임을 자각해야 한다. 반면 각자의 병안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신세계인들을 보며 현재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자칫 문명인들처럼 지나치게 행복을 쫓아 자신을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불안한 현실을 외면하고 그들처럼 자아의식 없이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또한 디스토피아를 통해 진정한 유토피아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지난달에 템페스트를 읽으면서 내가 원서를 읽을 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꼬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대사가 실생활에 써먹고 싶을 만큼 통쾌하고 빵빵 터졌기 때문이다. 마치 찰진 사투리가 외국어로 번역이 안되는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 저자도 그래서 템페스트에서 영감을 얻었을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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