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아의 장풍
최영희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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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덜트 소설이라 그냥 가볍게 웃기는 내용일 거라 생각했다. 보라. 제목도 현아의 장풍이지 않은가.

표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아 얼굴 옆에 시퍼런 아저씨 얼굴이 하나 더 있다. 즉 현아 안에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단 말씀인데 한 몸뚱이에 두 자아라니. 그림만 보아도 무언가 심오한 의미가 숨어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이야기는 우리의 지구가 다른 외계의 손아귀에 있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설계한 데이터대로 지구는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실수로 특정 데이터에 오류가 생기게 되고 그 오류 난 데이터가 열일곱 살 강현아다. 현아에게 생긴 오류란 바로 락사멘툼(팽창), 즉 장풍의 힘이 생겨난 것이다. 나로부터 무언가를 밀어내는 힘 말이다.

 

 

 

강현아는 평범한 여고생이다. 아니 따지고 보면 평범하진 않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따로 떨어져 혼자 살아간다. 뭐 이런 슬프고 애처로운 상황이 다 있담? 어찌 고등학생 딸을 혼자 살게 할 수 있을까. 당최 내 상식으론 도저히 납득이 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현아는 보기보다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아이돌 가수에 자신의 정신세계를 거의 내어주다시피했고 부당한 일을 보면 쉬이 넘기지 못한다. 그런데 우상 같았던 아이돌 그룹의 해체 소식에 세상이 끝난 것만 같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현아는 엔터테인먼트로 향한다. 이미 사옥 앞에 진을 치고 있던 팬들 사이에 끼어 있던 현아는 그런 팬들을 조롱하던 한 남자 때문에 분노하게 되고 그 순간 현아의 숨겨져 있던 오류가 드러나고 만다. 10미터쯤 솟구쳐 날아가 버린 남자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로 불의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장풍이 나왔고 현아도 점점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지구 밖 세계에서는 그런 오류 X, 즉 현아를 감시하고 제거 임무를 맡은 설계자를 내려보낸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재밌는 상황에 빵빵 터지게 된다. 어쩜 이리 글을 센스 있게 웃기게 쓸 수 있는지 오래간만에 이런 글을 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읽을수록 재미난 설정 덕에 작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현아라는 캐릭터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설계자가 지구에 떨어지는 장면, 설계자의 취향, 설계자가 현아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장면, 그리고 특정 이미지에 현아의 자아가 뒤바뀌어 무도인이 되는 장면 등은 정말 웃지 않고는 못 배긴다.

 

설계자 미카는 현아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전학생으로 오게 되고 오자마자 대놓고 현아에게 들러붙는다. 하지만 오류 X의 위험성을 걱정하고 내려온 미카에게 현아는 얼렁뚱땅 허당에다가 순진 무해해 보인다. 위험한 구석이라곤 불의 앞에 대책 없이 힘을 쓰려고 할 때와 무도인 최배달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불안한 순간이다. 그래서 미카는 혼란에 빠진다. 설계자들이 말하는 지구와 몸소 겪고 있는 지구는 분명 무언가 달랐던 것이다.

 

이곳은 데이터로만 가늠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p.52

 

그런데 의외로 현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에 대해 꽤나 긍정적이다. 되려 무너진 상실감을 되찾은 기분이다.

이건 누군가가 안겨 준 꽃다발 같은 거니까. 지금까지 중요한 날에 꽃을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 -p.65

 

그래서 그 고마운 힘을 올바른 곳에 쓰려 한다. 어쩌면 자신의 외로움까지도 던져버리는 쾌감을 느꼈을는지도. 암튼 여기서부터는 나까지 정의감에 불탔다. 혼내주고 싶은 인간들을 제대로 응징하는 순간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현아가 부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현아가 힘을 남용할수록 미카는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게 되고 결국 다른 설계자가  오게 되면서 현아는 더 위험에 빠지게 된다. 과연 현아는 제거되지 않고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야기에서 인상적인 건 미카의 변화다. 오류 X라고 부르던 명칭을 점차 쓰지 않게 된다. 이는 미카가 현아를 단순히 데이터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오류였다고 생각했던 현아는 오히려 세상에 대해 거침이 없다. 미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진심이 통한 걸까. 어느새 미카는 현아를 지키고 싶어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세계가 틀렸음을 알게 된다.

 

빵빵 웃음을 전하던 이야기의 끝은 반전과 함께 심오한 상황으로 찌릿하게 끝났다. 뻔하지 않은 결말에 여운이 오래가서 좋았다. 인류가 여태껏 살아온 패턴을 본다면 좋은 면보다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그랬기에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었을 테지만 세계는 특정 데이터로 해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렇기에 정작 위험인물이 아닌 신념이나 가치관에 흔들리거나 무너질 수도 있음을 마지막에서 보여준 것 같다.

 

한 소녀의 외로움을 이렇게도 씩씩하게 풀어나가서 더 좋았다. 세상은 해독할 수 없어 골 때리는 곳이지만 무심코 부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진다면 아마도 현아를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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