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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라파엘 몬테스 지음, 최필원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한 남자가 여자를 납치했다. 그런데 이 납치극은 완벽한 결말을 선사한다. 남자에게.
퍼펙트 데이즈는 피해자 여자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 제목이지만 이 책을 덮고 나면 왜 퍼펙트 데이즈인지 알게 된다. 그래서 더 소름이 돋는다. 현실의 시나리오는 너무나 남자에게 완벽했다. 인과응보란 사자성어는 남자에겐 의미 없는 단어일 뿐이다.
태우는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장애인인 엄마를 돌보고 있다. 그는 의대생이며 술, 담배를 하지 않는 등 자기관리가 철저한데 반해 주변에 친구가 없고 해부용 시체를 짝사랑하는 남다른 취향과 매스를 잡을 때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적인 면이 있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동행한 모임에서 한 여자를 알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꽤 적극적이었다.
클라리시는 친절하고 활달하며 자유분방하다. 미술사를 전공하지만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술이 과했던 것일까. 그녀는 태우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 것까진 좋았으나 살짝 입을 맞추는 돌발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태우는 그런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다. 어쩌면 그때부터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번호를 알아내고 그녀의 뒤를 밟고 마침내 그녀의 집에서 마주하게 되지만 이미 그 모든 작전을 알고 있던 클라리시는 그를 다그치며 몰아세운다. 한 남자가 적극적인 것 이상으로 스토킹을 한다고 느끼면 어떤 여자라도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클라리시는 똑 부러지게 자기 의사를 전달한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그 순간부터 꼬이게 된다. 태우의 광기가 이성을 눌러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은 더 심하게 비틀린다.
처음에는 태우를 단순히 스토커 정도로 여겼었다. 자신의 행동의 이유를 오로지 클라리시에게 전가하는 모습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가 의대생인 그의 장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클라리 시에게 약물 투여, 전 남친 토막살인, 클라리시에게 치명타를 가함) 하고 게다가 광기를 억누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임이 드러난다.
태우를 보며 사이코패스에게는 정말 놀라우리만큼 다양한 인격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여겼다. 그가 클라리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러한 면모가 두드러진다. 차분하고 이성적인듯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을 보인다. 심지어 꽤 설득력이 있어서 어떻게 보면 그가 클라리시를 그냥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쯤으로 녹아내리기도 한다.
클라리시도 그런 그를 파악했던 것일까. 반항하던 모습을 버리고 순순히 그에게 맞춰주는 모습을 보여주다 드뎌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던 그녀의 단호함은 그의 거짓부렁에 또 무너지고 결국 자신을 내던지게 된다. 순간 나약함을 벗어던지고 걸크러쉬같았던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태우의 소유욕과 집착의 근원이 무엇일까. 성장 배경? 애정결핍? 여러 가지 이유를 찾으려 해 보았지만 그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로 보인다. 엄마의 애완견을 죽이고, 살인을 해부실습 정도로 여기며 사랑하는 여자를 어떻게든 곁에만 두려 하는 광기에 치를 떨었다. 눈앞의 하나를 위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에서 그를 향한 조금의 연민도 생길 틈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를 위해 이 모든 일을 자초했지만 결국 자신을 위해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녀 없이 못 살 것 같았던 그가 그녀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흠집이 나는 건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더 악질로 보인다.
그런 인간은 철저히 세상에서 격리되어야 마땅하지만 그는 완벽하게 세상을 속이는데 성공한다. 운명의 신이 결국 태우쪽으로 손을 들어 준 것이다. 그의 임기응변에 나날이 기름칠이 더 해진다. 완벽하게 태우를 믿어버리는 사람들, 어쩔 수 없이 믿어야만 하는 사람들 속에서 가증스러움이 더 단단해지는듯하다.
그만이 자신이 범죄자임을 알지만 자신의 행위를 계속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사는 내내 두려움과 긴장감이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리고 해부용 시신에게 붙여주었던 이름이 딸의 이름이 되어버린 소름 돋는 순간처럼 언젠가는 그런 아찔함을 또 맛볼 것이다.
범죄소설을 즐겨보지 않지만 잘 쓰인 이야기 같다. 그래서 무서울 정도로 영특한 태우가 싫다.
그나저나 영화가 개봉되면 조금 망설여질 것 같다. 난 저 트렁크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어느 여배우의 것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