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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넘은 아이 - 2019년 제25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ㅣ 일공일삼 51
김정민 지음, 이영환 그림 / 비룡소 / 2019년 7월
평점 :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심한 질문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어찌 살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이가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신분과 계급을 중시하고 남존여비 사상이 심하던 조선시대, 가난한 신분의 맏딸로 태어난 푸실이라는 소녀가 책 한 권을 줍게 되면서 세상을 깨우쳐가는 이야기이다.
푸실이네는 부모님과 함께 풀밭에서 낳았다 해서 첫째 푸실이, 아들이라 귀한 둘째 귀손이, 여자아기라 아직 이름조차 없는 셋째 아기 이렇게 다섯 식구가 산다. 벌써 이름만 들어도 계집아이를 하찮게 여기는 모습이 보인다. 푸실은 부모님의 사랑은커녕 둘째 귀손이와 심한 차별을 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온갖 집안일까지 떠맡게 된다. 이유인즉 엄마가 남의 집 유모로 들어가야 할 처지가 되어서이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조차 구하기 힘든 때에 푸실은 산에 가서 먹을거리를 구해와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책 한 권을 줍게 된다. 그런데 책을 본 순간 푸실은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글자를 알 턱이 없던 푸실이었지만 책을 읽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인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상복을 입은 양반집 아가씨를 만나게 되어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그리고 책의 제목이 여군자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글을 꼭 배우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다.

그날 이후로 푸실은 글을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고 동네 언니에게 몰래 글을 배우게 된다. 글 배우랴 집안일하랴 잠마저 줄여야 했지만 푸실은 힘든 줄 모른다.
그나저나 푸실은 엄마가 양반집 젖어미로 가는 게 못마땅하다. 그렇게 되면 동생은 굶어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부모님은 아기를 포기하려 한다. 아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기의 운명을 그냥 하늘에 맡기려 한다. 양반 댁의 약조를 어겼다간 큰일 날 것이 자명했기에 우는 아기를 뒤로한 채 엄마는 눈물을 머금고 떠난다. 푸실이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떠나는 엄마의 심정도 오죽했으랴.

집안일보다 아기의 끼니가 걱정이다. 누구 하나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심지어 아버지는 본체만체다. 이웃 아주머니에게 젖동냥도 하루 이틀이고 아기는 점점 야위어만 간다. 하지만 푸실은 아기만은 꼭 살리고자 한다. 이는 서책을 읽고 나서 느낀 감정이었다. 산에서 다시 만난 양반집 아가씨에게도 책 내용을 말해주며 세상에 대한 원망보다는 나아가야 하지 않겠냐며 조언한다. 허나 아기는 제대로 먹지 못해 죽을 것만 같다. 그래서 푸실은 오지 말라는 엄마의 말도 무시하고 엄마를 찾아간다. 푸실은 동생을 살릴 수 있을까.

조선시대 여성이 푸대접을 받던 시절, 푸실은 글을 깨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았다. 비록 신분이 낮은 계집아이에 불과했지만 책을 품는 순간 차별과 부조리의 담을 넘는다.
이제 아는 것은 아는 것 대로 행하는 것은 행하는 것 대로인 삶을 살지 않겠습니다.
오래전 인간의 존엄은 불합리한 사상과 규율보다 뒷전이었다. 아기를 숨기는 푸실의 아버지나 어미젖을 물렸다고 푸실을 매질하려는 대감의 모습을 보며 인간의 목숨 따윈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계집으로 태어난 게 죄라고 말하던 시절에서 푸실은 글을 배우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고 양반집이라고 해도 여자가 글을 쓰는 행위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억압된 삶을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깨우려 하는 이들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으며 더디지만 달라졌고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도 신분과 성별로 차별을 받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다. 여전히 차별과 불평등은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 원망만 하고 있을 것인가. 푸실에게 세상과 부모님은 자꾸만 가만히 있으라고만 했다. 하지만 푸실은 차별의 부당함과 생명의 귀함을 일깨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푸실의 주변에는 뜻을 함께 하려던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들이 하라고 하는 삶, 남들이 하던 대로 하는 삶이 아닌 우리 서로가 함께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해 뜻을 모아야 함을 느낄 수 있다.
요즘 여성들이 유리천장을 깨듯 푸실이가 담을 넘어 달려가는 모습이 너무 대견스러웠다. 나 같으면 대감이 무섭고 매질이 두려워 발만 동동 굴렸을 텐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엄마를 찾아가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그리도 동생의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에서는 울컥했다. 나도 부당함과 차별에 좀 더 단단한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