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서점의 오월 - 80년 광주, 항쟁의 기억
김상윤.정현애.김상집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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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일종의 의무감으로 2012년부터 마음에 담아 둔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오늘날 5·18항쟁에 대한 폄훼가 도를 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 상황이 두 가지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고 본다. 1980년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들을 현재까지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박정희 군부독재부터 이어져 온 지역 모순과 차별을 끈질기게 부추기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권력을 움켜쥐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이 기록을 쓰게 만들었다.”-p.6

 

 

 

우리는 광주항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 우리 현대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을까.

나조차도 부끄럽지만 학창시절은 입시로 인해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지나버렸고 이십 대부터는 나만 생각하느라 역시 관심 밖이었다. 정치권은 늘 지역색으로 편이 갈려 내 편이 아니면 다 빨갱이고, 일베라는 족속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남의 아픔을 후벼파고 조롱한다. 사건의 진실은커녕 본질마저도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도 모자라 날조하여 퍼다 나른다. 게다가 역겹게도 사건을 지휘했던 우두머리는 여전히 큰소리치며 잘 살고 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여전히 시름 중이다. 이념과 사상으로 이 작은 나라가 자꾸만 쪼개것이 한심스럽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날의 일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제대로 알아야 올바른 소리에 힘을 보탤 수 있으니까.

 

이 책의 집필 목적도 그래서였다. 오죽했으면 그 시절의 살아있는 증인들이 끄집어내기도 몸서리쳐질 기억들을 다시 불러내었을까. 제대로 된 진실을 알리는 길만이 나 같은 독자뿐 아니라 지겹다고 떠들어대는 인간들 중 하나라도 반성하게 만들 것 아닌가.

 

이 책은 녹두서점을 운영했던 김상윤님과 그의 아내 정현애님, 그리고 김상윤의 남동생 김상집님. 이 세 분이 겪은 5.18의 모습을 날것 그대로 기술한 증언집이자 역사서다. 오히려 너무나 담담하게 써 내려가는 문장에 가슴이 더 먹먹해지고 애써 끄집어낸 기억들에 미안한 마음마저든다. 그렇지만 정말로 감사하다. 이런 분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민주주의의 시작은 더 늦춰졌을지도 모른다.

 

녹두서점의 탄생 배경도 지식인들의 소통이 목적이었다. 김상윤은 서점을 중심으로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며 의식화 작업을 해나갔다.

비판적 의식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물줄기를 제공하는 수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p.18

그렇게 녹두서점은 5.18항 쟁의 또 다른 산실이었다. 유신 체재를 반대하고 현 정권에 조용히 목소리를 모으려 했던 김상집 덕분에 이곳은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은 이들의 비밀스러운 장소가 된다. 게다가 노총각의 눈에 배필로 찍힌 정현애는 김상집이 잡혀간 후에도 서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책임진다. 서점은 학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도 하며 그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서점은 상황실 역할을 하며 서로의 안부를 전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여성들의 활약상을 볼 수 있어 울컥했다. 김상현 또한 제대 후 야학운동을 주도하고 형수와 처제를 돕는 일에 모든 힘을 보탠다. 한 가족이 이렇게 똘똘뭉쳐 민주화를 위해 뛰어들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정말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광주는 희그야말로 희생양이 되었다. 박정희가 죽고 막을 내릴 줄 알았던 유신 체재가 전두환의 군부독재로 더 악랄해지고 언론은 더욱 더 철저히 통제되어 민중을 눈과 귀를 막는다. 군부독재 타도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던 10일간의 광주는 그야말로 전쟁터가 된다. 무차별 폭력과 폭격이 곳곳에서 자행되고 은폐된다. 감시와 미행 그리고 연행으로 사람들은 사라진다. 민간인들은 눈앞의 광경이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다. 설마 하던 일들이 정말로 일어나자 광주는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 그 자체다. 그 과정이 얼마나 처참한지 민간인에게 총칼을 휘두른 군인과 경찰들도 미친것 같다. 영화 변호인과 택시를 보았을 때 느꼈던 참담함과 울분이 몇 배가 되어 나를 흔들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남겨진 사진들은 들여다보는 것 자체만으로 울컥하게 만든다. 정작 광주를 지킨 자들은 선량한 시민들이었다. 간첩도 아니고 폭도도 아닌 광주시민들이 직접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들은 계엄군에 맞고 쓰러지는 학생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택시 운전자들은 자진해서 다친 사람들을 실어 날랐고, 버스 운전기사들도 시위에 동참했으며, 시민들은 도망치는 학생들을 숨겨주거나 주먹밥을 나르기도 한다. 심지어 유흥업소 여성들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들까지 동참하며 광주를 불붙인다.

 

그러나 계엄군의 만행은 그야말로 학살이었다. 지나다 맞아죽은 사람, 호통을 치다 머리통이 깨진 노인뿐 아니라 남녀 구분 없이 속옷만 입힌 채 구타를 당하고, 수영하던 소년들이 총에 맞아 죽는다.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던 그때의 당사자들은 대체 지금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뿐 아니라 붙잡혀 온 자들에게는 빨갱이, 폭도, 극렬분자 등의 혐의를 뒤집어 씌워 잔악하게 고문하고 사건을 날조한다.

 

지독한 고문에도 살아남은 이들은 또다시 싸워야 했다. 김상현 씨는 그때의 심정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사형이 아닌 20년이 구형된 순간 기뻐했던 마음 때문에 여전히 괴롭다고. 그래도 정현애와 구속자 가족들의 노고 덕에 죄 없는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전락시킨 억울함이 풀린 것이 아닐까 한다.

 

 

 

광주는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권력에 눈먼 미친놈들 때문에 죄 없는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다. 살아남은 자들마저도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힘겨운 일상을 버텨내고 있다. 5월이 돌아오면 김상집씨뿐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은 여전히 죄책감에 마음이 무겁다고 한다.

폭도로 내몰린 그들이 민중 투사가 되기까지 험난했던 과정들을 들여다보며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날 광주의 실상과 그들이 지켜내고자 한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과 유가족분들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p.s) 내가 아는 쌍욕이란 욕은 다 뱉어내며 읽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버젓이 입에 재갈을 물리고 싶은 인간들이 득실대기 때문이다.

 

며칠간 밥도 못 먹었다는 청년, 양말이라도 갈아 신었으면 좋겠다던 어린 시민 군, 계엄군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에 밥이라도 해 주고 싶어 자신은 남아 있겠다던 아주머니, 버스터미널에서 구두를 닦다가 공수의 만행에 떨쳐 일어선 박래풍, 술집에서 술을 팔다가 항쟁에 발 벗고 뛰어든 아가씨! 이 책은 바로 이들에 대한 헌사가 되어야 한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자괴감이 온몸을 감싼다.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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