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열기
가르도시 피테르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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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미클로스와 어머니 릴리는 1945년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6개월 동안 편지를 주고받다가 스톡홀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50년 동안 나는 두 분이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998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어머니는 꼭 우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내게 수레국화처럼 파란색과 진한 붉은색의 실크 리본으로 묶어놓은 커다란 편지 다발 두 개를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희망과 불안이 어려 있는 것을 보았다. - 에필로그 중에서

 

 

이 이야기는 기적이 만들어 낸 희망과 희망이 만들어낸 기적이라는 두 요소를 다 담고 있다. 강제수용소에서 성인 남성이 29킬로의 몸무게와 치아가 하나도 없는 상태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깝다. 그런 그에게 다시 삶의 닻은 내려졌지만 죽음은 닻을 다시 올리려 한다. 남은 시간은 6개월. 결핵균은 그의 폐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것이고 그는 한 번씩 찾아오는 발작에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그를 찾아오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새벽 4시를 기점으로 오르는 체온이었다.

늘 그랬듯이 더도 덜도 아닌 38.2도였다.

신열은 꼭 강도처럼 슬그머니 찾아와서 자신감을 심어주는 척하다가 새벽의 회색빛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곤 했다. -p.73

 

그가 지속적인 고열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보다 결혼에 대한 열망이 간절해진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오픈 된 편지 꾸러미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정확한 속내를 알 수 없을는지는 모르겠다. 이대로 죽는 게 억울해서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게 결혼이었는지 말이다.

 

미클로스는 강제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스페인의 한 병동에서 다시 시한부를 선고받지만 그가 꼭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결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처럼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여성의 정보를 손에 넣고 그녀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무려 117명에게.

 

그는 어린 시절 서점을 운영했던 아버지 덕에 책과 함께 성장했다. 덕분에 저널리스트이자 시인이었던 그는 편지를 쓰면서 삶의 에너지를 느낀듯하다. 그렇다고 그가 로맨티스트로 보이진 않는다. 어쩌면 전쟁이 그의 낭만스러움을 빼앗아간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열정이 많은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시한부생앞에서 결혼을 결심하는 이는 흔치 않으니까. 어쩌면 무언가를 함으로써 존재의 이유를 느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의 편지를 받은 순간 그녀들이 느낄 감정을 상상하는 것도 설레는 일이니까.

 

편지를 받은 이들 중 누구는 무시했을 것이고 누구는 편지가 잘못 배달된 것이라 여긴 이도 있었을 것이다. 릴리도 그런 여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픈 그녀도 병원에서의 생활에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게 그의 편지에 답장을 쓴다. 그렇게 편지가 오가는 사이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가슴 한구석에 온기가 머물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살아남았다는 것보다 이제는 살아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된다.

 

 

 

 

미클로스는 엉뚱하고 유쾌하고 재치가 넘쳤다. 시한부 인생임에도 담배는 끊을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릴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다른 여성들과 편지를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난처한 순간도 겪게 된다. 편지를 받은 여인 중 클라라라는 여성은 미클로스를 만나기위해 달려왔다. 사회주의 사상을 신봉한다는 같은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재치있게(?) 그 순간을 피해 간다. 실은 자신이 친구의 편지를 대필한것이라고.ㅎ 클라라를 생각하면 조금 난감하고 안타깝다고 해야하나..

결혼반지를 사게 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담대한 꾀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고도 남는다.

게다가 그는 사소한 행동에도 자신과의 내기를 건다. 나 같으면 뒤로 나자빠지는 것이 두려워서라도 하지 않을 같은데 그가 의자를 기울여 두 다리를 들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려던 행동만 보아도 그는 어딘가 달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때도, 그리고 나중에도.

-p.167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과거를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책에서 그들이 말하지 않은 과거의 장면들을 접하는 내내 활자 위에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인간의 잔혹함의 끝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오죽하면 릴리는 개종을 하고자 한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지옥 같은 경험을 한 그녀에게 자신의 뿌리조차 원망스러워 부정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들은 그렇게 6개월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서로에게 진심을 전했고 희망만을 말하려 했다. 그러는 사이 미클로스의 새벽의 열기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6개월보다 더 오래 살게 될 기적의 순간을 맞이한다. 순간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인간이 있고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는 이외수의 시가 떠올랐다. 미클로스의 강한 믿음과 선택은 결핵균마저도 발효가 된듯하다.

 

실화를 통해 다시 한번 느낀 건 삶에 대한 열정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삶에서 그가 찾으려 한 것이 사랑이었다는 사실에 그 어떤 로맨스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미클로스가 쓴 시를 읽고 나니 그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린 형제여, 만일 내게 아들이 생긴다면

그에게 가르쳐 총칼은 절대 진실이 아니라고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건

멀리 날아가는 로켓포가 아니라고

그리고 장난감 가게에 들르게 되면

납 병정도 무기도 사주지 마

대신 나뭇조각을 사줘

그 아이가 죽이는 방법이 아니라 건설하는 법을 배우도록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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