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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베티 ㅣ 큰곰자리 47
이선주 지음, 신진호 그림 / 책읽는곰 / 2019년 5월
평점 :

민정이는 주영이랑, 지현이는 우진이랑, 지아는 경희랑 걸어간다.
초희, 지영이, 정연이는 셋이서 걸어가고, 용희, 태영이, 작은 영지, 큰 영지는 넷이서 걸어간다.
나는 혼자 걸어간다.
서연이에겐 자신의 마음을 보여 줄 이가 없다. 아니 마음의 소리를 들어줄 이가 없다. 심지어 부모조차도.
그냥 베티라는 제목만으로 혼혈아의 친구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내 답답하고 조금 혼란스럽다. 분명 코피노 문제를 직시한 소설인데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 때문에 더 화가 난다. 작가가 아이들의 내면과 우정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 어른들의 못난 면을 더 부각했던 걸까.
서연이는 친구가 없다. 엄마 때문에 친했던 친구의 비밀이 퍼진 뒤로 서연이는 마음 한구석이 닫혀 버렸다.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자책과 원망으로 곪아버렸다. 엄마조차도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해버렸고 서연이는 그때부터 스스로를 가둔 채 혼자 걸었다. 화가 나도, 싫어도, 아무 말도 못 하자 그냥 착한 아이로 통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서연이에게 베티가 오게 된다. 엄마의 일방적인 통보로 오게 된 베티였고 자신이 생각한 외국인의 모습이 아니라 당황했지만 서연이는 베티의 사연을 알게 되자 묘한 동정심과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일방적인 어른들의 그늘 속에서 속마음을 닫은 채 똑같이 착한 아이로 지냈던 탓일까. 두 소녀는 서로의 서글프고 답답한 처지를 텔레파시처럼 느끼며 점점 가까워진다.
베티는 자신의 엄마를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간 아빠를 만나러 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엄마의 바람일 뿐이다. 베티는 필리핀이 좋았고 엄마를 버린 한국 아빠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너무나 간절하고 절실했다. 그런 엄마가 상처를 받을까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자 상처만 커져간다. 소송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아빠라는 사람이 너무나 싫을 뿐인데도 엄마는 베티에게 감정마저 강요하며 아빠에게 매달리고 집착한다. 베티의 감정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는 엄마. 서연의 감정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엄마.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남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주고 있는지 모른다. -p.42

서연이는 그런 베티의 마음을 언제나 돌봐준다. 반 친구들 때문에 베티를 한번 외면했던 일이 늘 마음에 걸렸지만 점점 베티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커져만 간다. 왜냐하면 자신도 자신에게 늘 일방적인 엄마 때문에 화가 쌓여있었고 그런 화를 베티가 다가옴으로써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베티도 서연이의 마음을 헤아려준다. 서연이가 반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걸 알게 되자 그 친구 엄마에게 전화를 건 일로 완전 멘붕상태가 되었을때 베티가 곁에 있어준다. 그렇게 둘은 어느새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지가 되는 사이가 되어갔다.
'미국, 영국, 프랑스 같은 나라는 좋은 나라이고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같은 나라는 나쁜 나라’라는 말을 내뱉고 공감력은 일도도 없는 아빠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남의 마음을 판단하는 사람들 중에 대표격인 엄마는 딸에게 친구가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이의 심정 따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어른들의 이기심 때문에 아이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조금씩 베티의 힘든 상황을 보다 못한 서연이가 입을 열기 시작한다. 물론 유창하진 않지만 베티의 솔직한 마음과 자신이 여태껏 엄마에게 부탁하고 팠던 말을 꺼내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베티를 창피하게 여겼던 마음을 거두고 친구들 앞에서 당당히 말한다.
"나는 나예요. 나는 베티예요. 베티 앙이 아니에요. 베티 강이 아니에요. 나는 나예요. 나는 베티예요.”라는 말속에 많은 감정들이 오갔다. 무책임한 남자들 때문에 화가 났고 상처받는 아이들 때문에 가슴이 쓰린다. 게다 시위하는 이들을 향해 또 한 번 생채기를 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이게 우리의 현 수준인듯해 답답하다. 타인의 문제에 너무 쉽게 단정 짓고 판단해버리는 건 아닌지, 혹여 나의 말 한마디로 다른 이의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베티는 돌아갔지만 서연이는 자신의 변화를 느꼈다. 서연의 원래의 모습을 꺼내준 베티 덕에 이제는 더 이상 혼자 걷지 않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책을 덮고나서 느꼈던 우울하고 무겁던 마음 한편이 조금 나아진듯하다. 비록 베티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생각하면 괘씸하기 그지없지만 베티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그냥 베티로 씩씩하게 살아갈 것임이 느껴진다. 세상은 그래도 가짜 어른보다 진짜 어른이 더 많다고 믿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