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헤이세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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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시대(전 세계에서 연호를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인 일본의 시대 구분 중 하나로, 1989년 1월 8일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한 때부터 아키히토가 퇴위한 2019년 4월 30일까지를 이른다. 2019년 5월 1일부터는 나루히토가 취임하면서 '레이와' 연호가 사용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라는 단어를 나도 얼마 전에 뉴스에서 접했다. 쇼와시대가 끝나고 사용된 연호가 헤이세이였음을 다시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걸그룹 멤버의 일본인 출신 아이돌이 공식 계정에 올린 글이 문제가 되어 며칠씩 떠들썩해지자 머릿속에 헤이세이란 단어가 콕 박혀버렸다. 일본인들에게 헤이세이 시대란 어떤 의미일까.

 

여기 헤이세이 시대에 태어난 한 남자가 있다. 그런데 그는 헤이세이가 끝나는 날 자신도 죽겠다고 한다. 자살이 아닌 안락사로.

소설 속에는 일본이 안락사가 허용된 나라로 나오고 있다. 그것도 모르고 우습지만 일본이 언제 안락사를 합법화한거지 하며 오해했다.

 

답답하지만 그가 안락사를 결정한 이유가 내내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똑똑하지만 신중한 편이고 말을 아낀다. 사랑에 서툴고 표현도 서툴지만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한 것 같다. 심지어 동거녀에게조차도 거리감을 둔다. 여자친구가 먼저 대시하고 같이 살게 되긴 하였지만 계약 연애를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 이유에 더 확신감이 든 건 그는 그녀와 섹스를 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섹스라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다 보니 여자친구는 자위 용품에 적잖은 지출을 한다. 그것도 그의 카드로.

 

여기까지만 보면 분명 이상하다고 오해를 받을 쪽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그런 남자친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아니 어쩌면 참아준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초반 그들의 라이프 스토리만 보면 평범한 커플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어느 날 남자는 그녀에게 지나는 말처럼 그만 살겠다고 내뱉는다. 죽음으로써 영원히 굿바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늘 무심한 그의 스타일이 몸이 익숙해져있다 보니 그런 통보에도 무덤덤해진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너무나 많이 사랑한다. 그의 외로움도, 슬픔도, 그리고 남모를 아픔까지도 감싸 안아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정상적인 연인처럼 이유를 따져 묻고, 설득도 해보고, 달래기도 해 보는 등 최선을 다해 그를 세상에 붙잡아두고자 한다. 그러나 어이없게 돌아온 그의 대답은 헤이세이 시대에 운 좋게 많은 행운을 누렸으니 시대가 끝나면 자기도 떠나는 게 맞는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댄다. 제아무리 그럴싸하게 둘러대도 이기적인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특히 그녀와 19년을 함께한 고양이를 그녀가 없는 사이 안락사 해버렸을 땐 정말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좀 더 납득할만한 이유도 대지 못한 채 안락사 현장을 찾아가기도 하고 안락사를 주관해서 화장까지 말끔히 해 주는 업체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는 대체 왜 그토록 죽는 일에 매달리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멀쩡한 사람이, 그리고 자신을 챙겨주는 연인도 있는 사람이, 게다가 사회적 명성과 능력과 경제력도 되는 사람이 왜왜 세상과 안녕을 고하려는 걸까.

 

 

 

 

여기서 나는 혼란에 빠졌다. 안락사에 대해 찬성 입장에 섰다가 점점 반대 입장 노선에 서게 되었다. 우선은 안락사에 대한 찬반 논란을 따져보다가 그녀의 아픔과 슬픔이 느껴져 반대 의견으로 기울었다. 또 안락사 현장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과연 죽음도 내가 선택할 권리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일까 고민에 빠졌다.

 

물론 후반부에서 그럼 그렇지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되는 그 죽을 수밖에 없는 그의 사연이 밝혀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자신의 빛을 내고 있는 이들을 떠올리니 그의 선택을 절대 존중할 수 없었다. 반면 그가 고백 후 좀 더 솔직하고 인간적인 속내를 드러내자 마음을 돌리지는 않을까 기대를 가지기도 했다.

 

이렇듯 소설은 안락사의 찬반 논쟁으로 문을 여는 듯 하지만 결국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거짓 없이 솔직한 그녀 앞에 관계에 서툰 남자가 관계를 배워가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그런 그를 움직인 건 죽음에 더 가까웠던 그녀의 고양이였다. 고양이의 죽음은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보여주었다. 안락사로 고통을 덜고 떠난 이와 남겨진 이의 고통이라는 두 가지 상황을 경험해봄으로써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

 

마지막 그의 선택지에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녀에 대한 배려를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를 향한 미안함과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조금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녀의 이름이 아이(愛)인 것도 역시 사랑의 힘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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