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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평점 :

책을 덮은 뒤 책장 앞에서 박완서 님의 책을 뒤적였다. 좀 더 작가님의 글을 읽고 싶었기에. 단편에 녹여 낸 1970년대의 일상이 그리 촌스럽지 않고 재밌다. 화장품 화보지에 실렸던 콩트들 속에 이집 저집 속 사정이 듬뿍 담겨 있을까. 48편에 깃든 시대의 흔적에 사소한 내 일상마저도 아끼게 된다.
흑백 같던 삶이 조금씩 칼라를 입던 시절. 그 시대의 가치관과 변해가는 모습은 많은 이야기들의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억압받고 차별받던 여성의 모습과 남녀관계, 자본주의가 무르익어감에 따라 변질되어가는 인간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단절되는 이웃과의 관계 및 세대 간의 갈등 등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마른 꽃잎의 추억 1,2,3,4]편에서는 한 여성의 추억 찾기에 빠져보았다. 내조와 희생으로 삶이 공허해질 때쯤. 그녀는 그녀를 추종하며 바쳐졌던 꽃다발들의 주인공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낭만을 향한 일말의 기대감은 추억 속에서 이미 마침표를 찍었다는 사실만 깨닫고 만다.
나는 왜 낭만을 찾는답시고 간직하고 있는 낭만이나마 하나하나 조각 내려 드는 것일까? 이 낭만이 귀한 시대에. - p.71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1,2,3]은 삼대에 걸친 차별과 억압 속 여성의 삶을 말하고 있다. 청상과부 시어머니로 인해 인생이 꼬인 분희와 그녀의 며느리이자 외딸의 엄마인 경숙 그리고 그녀의 딸 후남. 세 여성은 여성의 제한적 삶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삼대를 지나오면서도 여성의 삶은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히고 만다. 절망적인 사실은 후남의 발목을 할머니와 엄마가 잡았단 것이다.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되는 게 당연시되던 시절. 여자의 적은 여자임이 확연히 드러나던 시절. 그 시대 후남이들의 눈물겨운 사연들이 궁금해진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초등학교 때 짝꿍이었던 후남이가 있었다. 그 친구에게 남동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내가 알던 후남이는 순정만화 캐릭터를 기똥차게 잘 그리던 아이였다는 것이다. 후남이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잘 살고 있을까?
눈 아래 거대한 도시, 그 갈피 갈피에 여자 길들이기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가 공룡처럼 징그럽게 도사리고 있음 까지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 p.100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이야기도 있었다. 절에 가는 일이 유일한 낙인 어머니를 둔 딸은 함께 어머니가 다니시는 절로 동행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딸은 심한 불쾌감을 느낀다. 부처님을 모신 곳에서 세속의 욕망이 들끊는 장면에 분노를 느낀 것이다. 어쩌면 그리도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흡사한지. 그러나 그런 생각에 어머니는 일침을 가한다.
"넌 잠깐 동안에 별의별 걸 다 봤구나. 나는 십 년을 넘어 다녔어도 부처님 한 분 우러르기도 벅찼는데" -p.189
[어머니]를 읽으며 평소 종교에 대한 막연한 불신을 조금 걷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동안 추한 것만 골라 보고 그걸 미워하고 헐뜯는 시간으로 삼았던 것이다.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p.189
여전히 시댁은 어렵고 남아선호 사상으로 셋째까지 보는 집도 있으며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 엄마의 허락이 아니면 꼼짝 못 하는 마마보이도 있다. 상대를 거절하기 위한 방편으로 궁합을 핑계 삼은 일은 실제로 들은 적이 있기에 헛웃음도 났다. 그때보다 세대차는 더 벌어져서 외래어보다 신조어가 더 무섭고 도미노같이 솟은 아파트들 사이에서 층간 소음은 더 커져만 간다. 이웃 간의 정은커녕 인간과의 신뢰조차 믿을 수 없는 사회를 보며 세상이 측은해진다.
게다가 [꿈은 사라지고]편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가정부를 둔 워킹맘 선영은 남편의 감기약을 사러 약국에 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정부가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먹인단 사실을 알게 된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몹쓸 가정부로 인해 절망과 좌절을 느낀 이야기에 분통이 터지고 소름이 돋았다.

연휴 기간 잠깐 짬을 내어 아파트 뒷산에 올랐다. 산 중턱에서 바라본 도심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땅 위를 아파트가 허옇게 덮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갑갑함이 밀려온다. 아파트의 모양새처럼 사람 사는 모습도 비슷하겠지만 시대가 변해도 사회가 떠안고 있는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작가의 글 쓰는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하나하나 탄생한 이야기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삶의 가치를 재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를 섬세하고도 측은하게 바라본 작가의 눈길은 나를 더 철들게 해주었다. 이렇듯 일상에 쉼을 던져주는 글들이야말로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휴식이다. 마지막 [나의 아름다운 이웃] 을 읽으며 나는 내 이웃에게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