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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평점 :

요즘 내가 즐겨 듣는 라디오 코너가 있다. 청취자가 보낸 짧은 사연을 들려주는 코너인데 온몸에 착착 감겨서 좋아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다른 사람 사는 모습에 위안을 얻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그들의 사소한 다툼도, 서운한 감정도, 고마운 마음도 다 내 것만 같아서 위안이
된다. 그래서 요즘은 단편을 자주 찾아보게 된다. 라디오 사연만큼 감기지 않거나 그 의미를 분석해야 하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긴 여운을 즐기다
보면 삶의 지혜도 진하게 온다.
그나저나 책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박완서 작가의 책이 제법 꽂혀 있다. 언제 사서 읽은 걸까. 색이 제법 바랜 만큼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내용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당시 심적 스트레스에 도움이 되었기에 저 책장 비좁은 곳에서 자리하고 있단
것뿐이다.
이 책은 한국작가 29인의 박완서 작가 콩트 오마주이다.
이제서야 국문학을 조금씩 읽고 있어 이 29의 작가 중 절반 이상은 낯선 작가지만 다양한 소재만큼 개성 있는 글들을 만나볼 수
있어 의미 있었다. 예전에 작품 이야기를 나누다 멜랑콜리에 숨은 뜻을 두고 의견이 분분해서 그 뜻을 찾아본 적이 있다. 멜랑콜리속에 기분이
야릇하다, 야하다는 속뜻이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사전적 의미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melancholy : (장기적이고 흔히 이유를 알 수 없는 ) 우울감, 구슬픔 통상적으로 딱 이렇다 할 이유 없이 괜시리
기분이 울적하고 뭔가 애매한 기분이나 느낌이 들 때 '멜랑꼴리하다'라고 표현.
책의 제목은 두 편의 제목에서 각각 따온 것이다. 백민석 작가의 [냉장고
멜랑콜리] - 잘못 배달된 냉장고 때문에 멜랑콜리하던 남자는 매일이 서럽다. 그렇게
힘겹게 싸워내고 한 달 후 새 냉장고와 행복하던 시간도 잠시, 다시 헬스용 자전거 때문에 멜랑콜리해지고 만다 -와 백수린 작가의 [언제나
해피엔딩] -현재의 초라함과 미래의 불안감에 생각이 꼬인 여자는 타인과 마주한
자리에서 불안한 미래보다 지금의 온기를 생각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
마치 원래 하나의 제목인 것처럼 이야기는 누군가의 삶의 일부인 듯하지만 누군가의 삶 전체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짧은
이야기들이지만 인간 세상 사 수만 가지의 모습만큼 온갖 기분을 다 맛보았나고 나 할까. 외면하고픈 기억에 밀려드는 후회,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산다는 것의 두려움, 복잡한 일상에서 오는 혼란스러움에 내가 머물다 사라진다. 부부, 연인들의 삶에서 전해지는 솔직함이나 인간의
이중적 면모를 잘 잡아내는 등 훈훈함을 전한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 가장 리얼리티를 꼽으라면 이기호 작가의 [다시 봄]이 아닐까. 비싼 레고 장난감을 술김에 사들고 온
아버지는 그 다음날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환불을 해야 한다. 아들과 함께 마트로 향하는 길이 참으로 처량하고 서글프다. 축 처진 어깨의 무게는
어린 아들이나 아버지나 매한가지일 터. 장난감 회사를 향해 분풀이라도 해야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남주 작가의 [어떤 전형]도 대학 입시의 웃픈 현실을 보여준다. 종교 전형이라니.~~ 딸아이의 입시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조건이라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도 알겠지만 대한민국 입시 전형의 삐뚤어진 실태에 헛웃음이 난다.
윤이형 작가의 [여성의 신비]는 우정이라 믿고 있지만 우정도 한낱 겉모습에 불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SNS로 인해 아마 한
번쯤은 다들 경험이 있을 법한 이야기. 우리가 얼마나 쓸데없는 곳에 감정을 소비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끝이 없이 서로의 현재를 비교하고 다른 점을 찾아내려 한다. 너의 행복을 나의 불행으로, 너무도 쉽게 치환해 버린다.
-p.171
최수철 작가의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죽음]은 깨닫는 바가 많았다. 그가 정말 게을러서 죽어버린 것일까. 허허 웃다가가 이내
침묵하게 만드는 강한 울림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섣부른 판단으로 누군가를 낙인찍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하며 이제부터라도 큰 아이가
느려터졌다는 말은 그만해야겠다.
평모를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실은 견해차가 크다는
사실이다.-p.296
그 외 미스터리한 분위기에 오싹하기도 하고 상황의 반전으로 웃음을 주는 이야기들도 있다. 내게 있어 이야기는 현재다. 모호한
이야기에 숨어든 의미에 길을 헤매더라도 이야기는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주고 관계의 어려움에 해답을 제시하며 불안한 미래에 디딤돌이 된다. 그래서
읽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멜랑콜리한 날들마저도 즐길 수 있길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