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벚꽃
왕딩궈 지음, 허유영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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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슬픔의 덩어리들을 품고 산다. 그리고 문학은 그런 덩어리들의 아픔을 들여다보며 내속의 아픔을 달래기도 한다. 소설 속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름 없이 등장한다. 소설은 그런 '나'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구체적인 진술보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을 요한다. 마치 미완성된 그림에 색을 입혀가고 있는 느낌이지만 색의 조화를 이뤄내기가 어려운 느낌이랄까.

 

'나'라는 인물은 어린 시절 장애인 어머니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로 인해 인생의 깊은 절망과 상실감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 온다. 인생의 아웃사이더 같던 그가 직장에서의 소속감도 느끼게 되고 게다가 비루하기 짝이 없다고 여긴 자신의 영혼에 영감을 불어넣어 줄 반쪽을 만나게 된 것이다.

 

추쯔가 바로 나를 가장 기쁘게 만드는 영감이었다. -p.99

 

그러나 그에게 다시 삶의 비극이 찾아온다. 과연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지진이었을까, 주전자였을까. 아니면 추쯔의 웃음소리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의 가슴 흉터였을까.

 

수많은 사상자와 피해를 낳게 한 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는데 추쯔도 그중 하나였다. 지진의 충격을 떨치지 못하던 아내를 위해 쇼핑을 나서지만 그녀는 주전자 하나만 산다. 그러면서 함께 받은 이벤트 복권에서 카메라가 당첨되는 행운을 누린다. 다행히도 사진 찍는 일에 몰두하자 서서히 그녀는 생기를 찾아간다. 그때 만나게 된 뤄이밍 선생은 그가 아버지였으면 하는 바람이 잠깐 스칠 정도로 선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었지만 그의 가정을 파탄 나게 한 적이 되고 만다.

 

추쯔가 사라져 버리자 그는 인생을 더 끌고 갈 수가 없다. 모든 걸 포기한 채 바닷가 마을 귀퉁이에서 카페 문을 열어놓고 그녀를 기다리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어느 날 뜻밖의 남자 뤄이밍과 카페에서 마주치게 된다. 그날 이후 자살을 시도한 뤄이밍으로 마을은 뒤숭숭해지고 갑자기 등장한 그의 딸 뤄바이슈로 인해 분위기가 묘해진다.

 

사람의 일생에 몇 번의 연애가 허락된다 해도 나는 단 한 번으로 끝날 수 있기를 바란다. - p.99

 

 

 

 

나와 추쯔. 뤄이밍과 뤄바이슈.

이들의 캐릭터조차 불분명해서일까. 그들의 관계보다는 각자가 지닌 슬픔의 근원에 더 치중하게 된다.

 

때때로 찾아오는 아버지의 기억은 '나'를 침하시킨다.

정지된 순간들과 못다 한 기억들조차도 추쯔와는 나눌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짐작뿐인 추쯔의 상처에 자신의 아픔을 더 얹고 싶진 않았으리라. 그만큼 그녀를 아꼈지만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해서일까. 주는 법이 너무나 서툴러 보인다. 일을 통해 얻는 인생의 법칙보다 사랑을 이해하는 일은 영원한 숙제 같다. 그가 그의 모든 것을 그녀와 나누었더라면 어땠을까. 서로의 아픔을 물어봐 주고 헤아려주는 일이 먼저였다면 분명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뤄이밍은 선의를 실천하는 자로 동네에서 많은 이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남의 여자를 탐한 죄책감에 자살을 시도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찍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였던 그에게 추쯔의 미소는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딸 뤄바이슈는 그의 일기장 속에 잠깐 머물러 있던 존재였다. 갑자기 나타나 인질이 되어 그의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무엇을 용서받겠다는 것이며, 또 그의 영혼을 불러낼 방법을 찾을 거라는 말은 또 무엇인지 의구심이 내내 들었지만 그의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데는 성공한 인물로 보인다.

 

아픈 기억을 눌러놓고 사는 이들은 그 기억에 묶인 채 떠밀리듯 살고 있지만 우리는 적당히 감추고 적당히 덮으며 적당히 아닌 척 살아간다. 슬픔은 크기와는 상관없이 슬프기에 슬픈 것이고 때때로 드러나는 슬픔을 위로받기 위해 누군가와 관계를 이어간다. 한 번도 아니고 그는 두 번씩이나 인생을 강탈당한다. 생에서 자신의 일부분을 잃어본 사람들은 그 나머지 인생을 온전히 살수 없으며 더구나 일상이 없는 이들에게 미래가 그려질 리도 없다. 그녀가 돌아온다고 예전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의 남은 이야기보다 사라진 그녀가 더 걱정스러웠다. 대체 그녀는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처량하게 집을 나서던 그녀의 뒷모습만 내내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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