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 이생진 산문집
이생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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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는 잘 모른다. 아는 시인도, 아는 시도 거의 없다. 하지만 최근 우연찮게 참석했던 시 낭송 모임 덕에 시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시가 좋은 건 아니다. 그냥 노래를 듣듯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읽는다. 그중에서도 자연이나 풍경 그리고 작은 일상을 끄적이고 있는 시가 와닿는다. 그리고 시를 보면 늘 놀란다. 어쩜 이런 표현을 떠올릴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요즘 부쩍 글을 쓰면서 모자람을 많이 느끼고 있다. 무언가 고갈된듯한 느낌이랄까. 별로 재능도 없는데 글이랍시고 긁적이다 보니 한계에 다다른 느낌도 오고... 그래서 나름의 방안이 국내 작가의 산문집이나 에세이를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신선한 스토리나 짜임새 있는 소설도 좋지만 심리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보기엔 이만한 장르도 없을 것 같았다.

아는 시인이 별로 없으니 당연히 이생진 작가도 내겐 낯설다. 바다와 섬을 좋아해 '섬 시인', '바다 시인'이라고 불린다는 작가의 이력에서 끌림이 왔고 우선 시보다는 산문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먼저 전해 듣고 싶었다.
시작부터 역시나 작가의 자연 사랑을 엿볼 수 있어 동지를 만난 듯 반가웠다. 꽃과 나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나이가 든 거라는 말을 온몸으로 실감해서인지 요즘은 자연을 보며 인생을 이해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가 콕 집어 자연 찬양을 늘어놓은 문장들이 반가워진다.

자연은 정직의 대명사다 산이 거짓말하는 것 봤느냐.
바다가 나쁜 짓을 함께 하자고 유혹하는 것을 봤느냐. 구름이 남의 집 담을 넘 자고 하더냐.

자연은 너의 친구요 스승이요 신이 보낸 사자다.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버릇은 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온다.
산에 가거든 나무를 이해하려 하고 섬에 가거든 바람을 이해하려 하라.
그 출발이 여행이다. 여행은 너를 따라다니며 가르쳐주는 평생의 스승이요 동반자다.
- 섬에 가거든 바람을 이해하라, 중에서

 

 

 

여태껏 섬을 찾아 떠나 본 적이 거의 없다. 섬 하면 등대와 외로움과 낭만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여태 가본 섬이라고는 열 손가락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섬이 주는 낭만도, 고독이 주는 즐거움도 아직 잘 모른다. 그나마 우도는 큰아버지가 거주하셔서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드나들었기에 익숙한 느낌만 있는 곳이고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관광지는 등 떠밀려 다니기 바빴기에 추억이 별로 없다. 걷는 것 하나만은 자신 있는데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섬들만이라도 가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섬을 찾지만 그곳에서 느끼는 고독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섬이 주는 각각의 매력과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를 압도하기도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 넋을 잃다가도 한없이 약해지기도 하며 때론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 순간 시인이라면 시상이 떠오를 것이고 사진작가는 사각 프레임 안에서 멋진 구도를 만들어 낼 것이며 화가는 현실을 더욱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담아낼 것이다. 그만큼 자연은 누구나 예술가로 변신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시인이라면 섬이 주는 고독함을 즐길 줄 알아야 하고, 모든 소리에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죽은 자의 소리를 듣고 산 자의 귀에 담아 줄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시인이 되는 것이라는 말로 시인의 역량을 강조한다. 이십 년 전 자신이 펴낸 산문집을 다시 꺼내보며 행복함을 느낀다는 시인 이생진.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며 글 쓰는 즐거움에 행복하다는 그는 다시 태어나도 시와 살겠다고 한다.
그의 글은 산문인 듯 시인 듯 애매하지만 내겐 그런 느낌이 좋았다. 산문 속에 시의 은율을 발견하기도 하고 멋진 구절 앞에서 몇 번씩 곱씹어 넘겨본다. 곳곳에 그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는 또 다른 시로 다가왔다.

 

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식물과 곤충, 바람과 구름, 별과 어둠 사이에서도 오갑니다. - p.210

 

 

자연을 노래하는 시만큼 아름다운 문장은 없을 것이다. 해변이 주는 리듬에서 시의 선율을 읽을 수 있으며 해가 뜨고 지는 아름다운 리듬에 삶의 지혜를 배운다. 섬은 그리움과 존재의 이유에 대한 고민조차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곳이며 섬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은 큰 도시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다.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끌리듯 섬을 찾는 이들에게 시를 권한다면 그의 시집을 권하고 싶다.

시를 쓰면 소소한 일상에서 깨닫는 바가 많아진다. 사물 하나도 허투루 보게 되지 않으며 모든 것들과 소통하고 정을 나누게 된다. 작가도 시가 있었기에 삶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마무리 지으며 시와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강조한다.
자연은 복잡하지 않다. 단풍을 이해하고, 파도의 리듬을 느끼고, 겨울바다의 외로움의 깊이를 느끼기 시작한다면 시는 한층 더 가까이 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몸소 느끼는 자만이 삶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나는 산이 좋아 산을 찾는다. 책에 소개된 [낙엽]이란 시가 참 좋았다. 그래서 그의 시집 『산에 오는 이유』를 장만하련다.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때가 좋은 때다
그때가 때 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 하는 것을
울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
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

- 산에 오는 이유, 낙엽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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