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 - 제8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전혜정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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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로 만난 첫 작품은 <고요한 밤의 눈>이었다. 당시 편독도 심하고 독서이력도 피라미 수준이었던 내게 그 책은 꽤나 심도 있던 내용으로 기억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에 대한 공포와 감시사회에 대한 절망 등에서 민중이 깨어 있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그려내었던 점이 상당히 흥미로웠었다. 그 뒤 만난 <칼과 혀>도 고도의 심리전이 매력적인 작품으로 신선한 감흥을 주었었다. 그리하여 두 권의 책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기대치가 작동할 수밖에 없었다. 단숨에 읽게 할 만큼 난해한 구석은 없었으나 이전 수상작들에 비해 임팩트는 떨어져 보인다. 권력의 가식에 진절머리 나있던 건 오래전부터였고 정치가, 기업가들의 추잡스러운 민낯에 분노와 허탈감은 늘상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주제를 지속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깨우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실은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같고,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법이죠.
내가 누군지에 대해 자신하지 마세요.
마음이란 늘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p.224

 

 

한때의 명성이 그립고 다시 올 것만 같은 펜의 떨림이 간절한 작가 박성호는 대통령 리아민의 전기를 집필하게 된다. 그가 대통령의 유년시절을 듣고 있을 때만 해도 나도 그와 같이 순수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전기라는 것이 작가에게는 치명적 화살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리아민이 말을 놓기 시작한 시점부터.

리아민이 털어놓은 유년의 기억들은 소문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그것이 진실이든 부풀려진 망상이든지 남들과는 다르고 남들보다 좀 더 극적인 삶을 지닌 정치가라면 장기집권이 가능할 정도의 파워를 가져다줄 수 있다. 연설과 공약의 식상함을 전기로 메워보고자 한 리아민은 작가 박성호를 선택한다. 그러나 기억을 왜곡하여 대중심리를 조종하려는 고도의 잔머리꾼 리아민과 작가의 윤리의식 앞에서 갈등하기 시작한 박성호는 결국 충돌하게 된다.

대통령의 기억이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비슷하게 들린다면 당연히 그들의 기억을 삭제해야지.
대통령의 기억을 삭제할 순 없잖아. 안 그래? - p.65

남편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대화를 하지 않아요.
자신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할 뿐이죠. -p.69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작가나 그 어떤 토도 달지 말고 비위를 맞추라고 요구하는 리아민이나 정말 가관이다. 면담 형식이라고는 하지만 그들 사이에 대화는 없다. 일방적으로 리아민은 떠들고 박성호는 듣기만 한다. 정확한 주종 관계일 뿐이다. 지식인들을 제일 두려워한다는 권력자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들은 세상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인다. 작가는 이미 추잡한 정치인의 모습에 속이 뒤틀리지만 들여놓은 발을 뺄 수 없게 된다. 권력의 그물망에 걸려든 처량한 물고기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눈물을 참아내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켰다고 믿는다. 그러나 끝까지 강력한 한방은 없었다. 왜냐하면 박성호는 순수한 예술가일 뿐이었기에.

치밀하게 계산된 이중적인 인간 속내에 피로감은 배가 되고 각 캐릭터들도 하나같이 불유쾌함을 준다. 리아민의 자기 망상과 박상호의 안일하고 어벙한 태도, 애인인 듯 아닌 듯 모호한 사이인 정율리 기자의 당돌함과 집요함, 권력을 발판 삼은 야심가 수석비서관 김세원의 오만방자도 한몫 거들었다.

독재자 리아민의 모습은 수많은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의 민낯 같다. 전직 대통령의 쓰레기 전기집이 떠올라 역겹기도 했고 불면증을 극복하기 위해 여자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어이없는 고백은 권력에 취해 내다 버린 윤리의식 같아 추잡했다. 가면을 쓴 권력자들은 애초부터 국민은 순진해서 얼마든지 주무를 수 있다고 여긴다. 순진한 작가 박상호는 순진한 국민으로 대변되어 불쾌감은 극에 달한다. 치졸한 전술 앞에 펜이 당해낼 수 없었음을 알게 된 순간, 거대한 권력 앞에 철저히 이용당한 사실을 인지한 순간, 구역질이 올라온다. 고작 내뱉은 말이라곤 "당신들은, 나를, 속였어! 뿐이다.

나를 위한 삶과 타인에게 적당히 맞춰가는 삶, 우리는 어디에 더 비중을 두어야 선과 악에 놓이게 될까. 그는 소위 말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권력에 반기를 들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세상은 그리 현명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각자의 절실함 앞에서는 누구나 민낯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출판사 사장도, 작가 박상호도, 독재자 리아민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들이었다. 전기는 출간되었고 리리궁의 문은 닫혔다. 독재자 리아민의 또 다른 삶이 계속되는 동안 출판사도 승승장구할 것이고 박상호 자신도 명예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표지 위 그의 이름 석 자만은 그를 비웃을 것이다. 그의 펜끝에서 진실이 되살아나게 되지 않는 한 결국 그는 이방인으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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