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골짜기의 단풍나무 한 그루
윤영수 지음 / 열림원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마시면 젊어진다는 샘물 이야기가 등장하고 엘리스가 나무 구멍으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장면이 연상되는 이 한 편의 이야기는 독특한 소재와 발상의 전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태껏 판타지하면 외국소설이 흥미로웠고 마법사와 요정들이 친숙했었다. 하지만 윤영수 작가가 내놓은 새로운 세상은 동양적 색채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래서 이름이나 지명에서 오는 혼란스러움이 적다. 첫 장에서 보여준 각 가계도와 등장인물에 놀란 마음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자연스럽게 자리 잡혀갔다.

이 소설은 땅밑 지하세계에서 살고 있는 나무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은 우리 인간이 아닌 나무 인간이다. 즉 이야기의 중심이 자연인 것이다. 얼마 전 [나무의 언어]라는 책을 통해 나무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익숙한 듯 익숙지 않은 스토리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게다가 흥미진진한 캐릭터와 탄탄한 구성에 심도 있는 묘사는 상상력이 부족한 내가 원망스러울만치 놀라움을 준다.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우리는 아주 작은 부분을 더듬다가 죽어. 멍청이들! p.135

모든 자연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원시 신앙을 지금도 믿고 있었다면 지금 우리 자연의 모습은 어떠할까. 세상의 작은 부분을 더듬다가는 인간들이 어쩌다가 세상을 이리도 망쳐놓았을까.
작가는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를 구상하고 다듬었다고 한다. 자연을 소재로 인간에게 다양한 물음과 깨우침을 주는 소설은 여럿 보았지만 단풍나무는 더 심오하게 비판하며 인간 본연의 밑바닥을 잔인하게 긁어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최고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잘나지는 못해도 저보다 잘난 놈은 절대 못 보는 게 이놈들의 특성이오. -p. 381

인간의 세계에 뿌리내린 단풍나무 한 그루. 인간의 말을 하는 이 나무의 이름은 연토다. 그는 땅밑 나라 단풍동 운흘 집안의 자식이다. 그런 그가 지상에 뿌리내리게 된 사연이 무려 700쪽을 가까이 펼쳐진다. 책의 두께감에 펼쳐든 손이 저려왔지만 2부가 끝나고 3부를 펼쳐들면서 사건이 결말이 궁금해서 끈기가 생겨났다.

작가가 그려놓은 동굴국 세상도 우리네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기와 질투, 거짓과 비난은 물론이고 전쟁도 존재한다. 그들만의 시간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들이 세상 만물의 최고임을 자부한다. 그들은 어른이족이라고 불리며 태어남과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여러 종족으로 나뉘는데 걔 중 맑은이는 예지력을 가진 우수한 개체이다. 연토는 그런 맑은이 종족이 모여 사는 단풍동 운흘 집안의 아들이다. 그러나 연토는 출생에 의문을 가지고 있으며 검은머리짐승을 가까이하는 등 다른 맑은이들과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여기서 등장하는 검은머리짐승은 인간을 뜻한다. 어쩌다 지하세계로 들어오게 된 인간들은 이곳에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목숨을 부지한다. 즉 이곳 땅밑 세상은 지상의 세계와는 태어나고 죽는 과정이 다르다. 체외수정을 통해 다 성장한 어른의 몸으로 캐내어지고 몸집이 작아진 채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태어날 때 처음 마주한 이가 부모가 되며 그들과 가족의 연을 맺고 살아간다. 맑은이들은 식물의 기본 생태계를 반영한 듯 입으로 먹지 않고 발바닥의 빨판으로 수분을 공급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인간이란 존재는 역겨운 배설을 하는 열등하고 하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 단풍동에도 큰 사건이 있었다. 연토의 나이 세 살쯤으로 밝은샘 수원에 누군가 독초를 풀어 놓아 마을 일대와 그 주변이 쑥대밭이 된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사건일수록 소문은 끊이지 않는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마을을 지키는 수장과 무녀들 그리고 예지력을 지닌 맑은이들은 더욱 대우를 받기 마련이다. 어미산의 수장인 삼신어른 생은 마을의 제사를 관여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을 책임지는 인물로 사건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연토가 어미인 미단의 심부름으로 무녀 영기를 찾았다가 그녀로부터 운명의 존재가 곧 오게 됨을 예언 받는다. 그러나 그의 발앞에 놓인 존재는 다름 아닌 검은머리짐승 준호다. 하지만 연토는 행여나 그가 운명의 존재는 아닐까 하는 야릇한 감정이 뒤섞여 그를 돌보게 된다. 준호는 연토에게 예언대로 운명의 존재였을까.
분명 준호는 연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뿌리내리게 된다. 비록 준호가 이전 세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땅 위 세상과 통하는 곳을 찾는 일에 집착했지만 그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생겨나게 된다. 그 둘이 함께하는 동안 서로가 내놓은 다양한 관점들은 오만한 인간을 비판하기도 하고 삶의 이치를 내놓기도 한다.

눈으로 보는 것, 귀로 확인되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각자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땅속으로 이어져 있을 수도 또는 잠시 어떤 것으로 가려져 이음새가 보이지 않을 뿐 얼마든지 한 뿌리, 한 생명일 수도 있지 않는가.
땅 위에 태어났다가 땅으로 돌아가는 우리, 죽음의 시간을 거쳐 얼마든지 전혀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는 우리가 죽음 이전의 생명과 전혀 별개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긴 세월로 보면 모든 생명은 모두 한 덩어리, 땅이라는 매개체로 이어진 한 몸체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짐승들은 왜 하지 못하는 것일까. - p.219

너희 어른이 종자와 우리 검은머리짐승은 두뇌의 시작점이 달아. 우리 짐승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하나 삶의 경험과 깨달음을 뇌에 쌓아가는데 반해, 너희 어른이들은 뇌 속에 이미 가진 수많은 지식들 중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는 삶이지. 너희들의 피부 껍질이 벗겨져 몸체가 작아지듯이. - p.253

그런 둘 사이에 또 다른 인간 짐승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어그러지게 된다. 결국 준호와 헤어지게 된 연토는 그의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여행길에 오른다. 물론 준호의 행방을 찾기 위함이 먼저였지만 여행은 그를 성장시킨다. 한 여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죽을 위기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사막을 건너면서 느낀 삶의 위기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준 어족인간들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듯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삶의 도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떨어지는 건 용기와 지혜다.

고민하던 어제도, 어떻게 될지 불안한 내일도 오늘만큼 소중하지는 않다는 거요.
따지고 보면 온갖 고민도, 불안도 다 내 행복을 앗아갈까 걱정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 내 앞에 펼쳐진 행복을 잡는 사람이 바로 현자지요. -p. 368

수천수만의 다른 세상이 있어. 네가 선택한 세상에 너를 맞추는 게 답이야. -p. 370

여행을 떠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편견과 제멋대로의 추측, 섣부른 속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직접 부딪쳐야 했다.
새삼 미곤과 미단부리에게 고마웠다. -p.431

작가는 연토를 여행길에 올려놓음으로써 단풍동의 미제 사건을 해결할 지혜와 전쟁으로 마을을 구해 낼 용기를 얻게 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근원을 찾는 동안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자연의 조화를 위해서는 화합과 융화가 필요함을 말한다. 맑은이외 다른 종족들,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맑은이들은 머리만 굴릴 뿐 세상을 이끌어갈 힘도, 감당할 능력도 없어. 그들이 가진 예지력 역시 미래의 위기에 행여 도움이 될지 모를 하찮은 열쇠, 자기들 스스로도 어디에 어떻게 꽂아야 할지 모르는 미래의 끊긴 장면들일 뿐이야. 앞날의 충격적인 장면, 수많은 위험을 보는 그들로서는 세상의 모든 일, 삶의 시간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어. 다른 이를 품거나 안심시킬 아량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지.
그들에 비해 운흘 연토, 너는 아냐. 앞날을 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네게는 옳다고 믿는 일을 밀고 나갈 힘이 있어.
살아 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맑은이들이 보는 미래의 그림 역시 우리가 노력함으로써 바뀔 수 있는 밑그림일 뿐임을 너는 네 행동으로 증명하지. - p.678

마지막으로 그가 선택한 새로운 삶이란 인간 세상에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그것이 준호와의 인연이든 인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든 나는 그의 선택이 아름답고 고마웠다. 가을의 길목에 들어선 지금, 곧 깊어갈 가을 길 곳곳에서 내 발걸음을 멈출 단풍나무를 보게 되면 연토가, 그리고 단풍동 인물들이 하나하나 떠오를 것 같다.

가끔 아이가 묻는다.
엄마는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냐고.
뭐 대답이야 그때그때마다 달랐지만 무엇이 되든 땅이라는 매개체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산책길 주위에서 들려오는 풀들의 속삭임이 마치 어른이세상 주민들의 재잘거림 같다. 그만큼 여운이 오래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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