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집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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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이 공존하는 시간만큼 멍 때리기 좋은 순간은 없을 듯하다. 변화하는 색감을 따라 자연이 만들어 내는 실루엣은 인간의 감성을 적시고도 남는다. 그런 느낌이 충만한 그림 한 점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났다. 밝은 빛을 등지고 서 있는 집 한 채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에 시선을 놓아둔 채 머릿속을 메운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정말 실사 같은데...
그 뒤 나는 서툰 검색질로 르네 마그리트를 찾아보았다.

이야기는 [빛의 제국]과 마주 선 한 남자의 신비한 체험기를 그리고 있다. 실연의 아픔으로 길을 잃은 청년 제레미는 연인 캉디스가 사랑한 그림 앞에 마주 선다. 마치 그림이 그의 아픔을 알고 있었던 것 마냥 그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폐점 시간을 알리던 순간, 그림 속 창가의 불이 꺼진다. 마치 그림이 그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찾은 그림 앞에서 그는 그만 현실의 필름이 잠깐 끊어진다. 그리고 마치 꿈처럼 한 여인이 그를 빛의 제국으로 초대한다.

그는 그렇게 그림 속 빛의 제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부른 낯선 여인은 르네의 누드모델인 마르타라는 여인으로 제레미를 잘 알고 있는 듯 대한다. 꿈 속이라고 여기자 이 환상의 세계는 그의 잠재의식이 이끄는 대로 장면이 전환되고 캉디스를 불러낸다. 그녀와 열렬했던 순간이 재현되자 그는 마력에 빠진 듯 환상에 취한다. 사분 삼십 초의 시간이 지난 뒤 깨어난 그는 행복한 꿈이 누군가에 의해 방해받은 것처럼 찌증스럽다. 어떻게든 다시 같은 꿈을 꾸기 위해 용쓰는 철부지처럼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림 속으로 들어가길 간절히 원한다. 그 모습이 으찌나 어처구니없어 뵈는지 저건 순정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생각뿐이다. 현실 속 캉디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기보다 환상 속 그녀와 사랑에 빠진듯한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다.

빛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욕망이 간절해질수록 허황된 방법을 찾게 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별의별 방법에 몸을 맡기자 신기하게도 뜻이 있는 곳에 창문은 열렸으니 무려 세 번이나 들락날락한다. 점점 그를 다그치는 마르타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지금의 빛의 집 또한 어떤 모습일는지 궁금해진다.
당신 스스로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서, 누가 챙겨줄 거라 기대하지 말란 말입니다. -p. 141

이 흥미로운 모든 사실을 캉디스에게 털어놓아 보지만 오히려 그들 관계에 선만 정확해질 뿐이다. 사랑하는 감정이 정으로 남게 될 때, 서로에게 필요한 건 신선한 자극이다.  순정이 아닌 집착 같은 사랑이 지겨워진 여자는 그를 밀어낸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못난 남자는 환상 체험 덕분에 집착적 욕망으로부터 서서히 깨어난다.
그가 마르타의 말을 이해하고 그랬을까는 모르겠지만 결정적 한방은 질투였다.
“누드화를 그릴 때 가끔 모델이 되어주곤 했지요.

하지만 단 한 번도 내 얼굴은 그려 넣지 않더군요. 부인이 질투를 했거든요.” - p.67

그리고 마지막, 캉디스는 그에게 이런 말을 던지고 그를 자빠뜨린다.
"당신, 미스 뱅센에게 고마워해야 해 ......”- p.214

이 책은 뭐랄까. 마치 그림이 부리는 마법에 심취해 있다 사랑학 개론으로 마무리된듯하다. 그러나 [빛의 제국]이 주는 느낌이 강렬해서였을까. 아직 혼을 빼놓는 작품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예술작품이 살아 숨 쉬며 우리의 정신세계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 점에서 제레미는 그녀와의 관계 개선에 [빛의 제국]을 잘 활용한 셈이다.
산산조각난 존재, 덧없기 짝이 없는 운명에게 비상탈출구를 열어주고

또다른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들의 역할이 아닌가. -p.210

그러나 조금 섬뜩했던 장면도 있었다. 그림 속에서 오류로 남아 있다던 한 남자는 깨어났을까.

"나는 상상의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만 동시에, 작고 구체적인 디테일들까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도록 쓰고 싶다”던 작가의 말을 곱씹으며 노란 불빛이 감싸고 있는 현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림 한 편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단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르네 마그리트는 확실히 재능이 넘치는 자다. 괴짜 천재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있자니 시대를 앞선듯하다.
그의 작품세계는 책 속에서 마르타가 잘 요약해 놓았다.
그는 결코 사물을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법이 없죠.
언제나 한 박자 늦춰 사물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자신의 기억과 상상을 굳이 구별하지 않고 그 공백을 채워 나간답니다.
그게 바로 그의 스타일이죠.- p.66

그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더 기발한 작품들이 넘쳐나지 않았을까. 조금 더 찾아보니 그의 작품은 꽤 많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낳게 했다. 특히 눈에 들어온 그림이 있었으니 [피레네의 성]이란 작품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떠올리게 했다. 나와는 띠와 별자리까지 같단 동질감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열혈팬이 되기도 하였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기분 꿀꿀할 때면 DVD에 꽂게 되는 애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영감을 받은 르네의 작품들을 함께 찾아보게 되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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