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무려 열다섯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이가 있다. 해리 오거스트! 이 남자는 출산 과정도 순탄치 않았고 생모의 죽음과 생부의 외면으로 양부모 밑에서 길러진다.
이미 죽었다 다시 사는 삶을 그린 소설은 흔하다. 그러나 해리는 특이하게도 이전의 모든 기억이 축적되는 능력을 지녔다. 두 번째 삶은 너무 일찍 존재감을 드러내는 바람에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자살로 마감한다. 세 번째 삶부터는 이전 삶의 기억을 떠안고 더 빠르고 더 유리하게 미래를 조종할 수 있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가 잠시 스치기도 했는데 타임 루프 안에 갇힌 톰 크루즈의 모습이 떠올랐다. 반면 이 소설에서 해리는 타임 루프 안에 갇히긴 했으나 휠씬 더 치밀하고 복잡하게 끌고 나간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이 무더위에 읽고 있자니 농후해진 머릿속에서 텍스트가 겉돌았다. 지금 읽고 있는 삶이 해리의 몇 번째 삶인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공상과학 소설다운 작가의 문체는 논리적이고 흥미롭지만 다소 중압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해리가 무려 죽었다 다시 태어남을 지속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데는 그가 그의 삶을 사랑한 만큼 인류를 사랑했음을 느낄 수 있다.

소설은 해리가 태어난 1919년부터 역사적 과정 속에서 벌어졌는 사건과 사회현상들이 함께 하고 있다. 이전 삶에서의 사전 지식을 현재에 반영함으로써 인류의 발전 속도를 앞당겼다는 가설이 더욱 그럴듯한 것도 문명이 빠른 진보 덕이다. 그러한 논리에 저절로 당위성이 부여되자 작가의 치밀한 구성력이 놀라웠다.
산업혁명 이후로 급속하게 발전하던 인류는 부질없는 파괴 욕망으로 두 차례 큰 전쟁을 치르긴 하였지만 더 획기적인 변화를 거듭했다. 오히려 지금은 세상의 발전 속도에 인간이 따라가지 못하는듯한 모습도 보인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지금은 전혀 통용되지 않는 것도 또 급격하게 벌어지는 세대차도 이런 현상과 맞물린다.

해리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궁극적 이유를 찾기 위해 종교, 물리학, 의학을 파헤쳐 보지만 그 해답을 얻지 못한다. 그러한 능력이 신에게 선택받은 것인지 자인이 신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러나 열한 번째 죽음을 앞두고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소녀의 메시지를 전달받게 되고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깨닫게 된다.

크로노스 클럽은 그런 능력을 가진 자들의 비밀조직이다. 클럽은 이미 그렇게 해서 미래의 지식을 상당히 확보하고 있었다. 해리는 교수로 있던 삶에서 빈센트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망각하는 이들과는 달리 기억술사라는 특출난 능력을 지녔지만 빈센트는 그러한 능력을 이용해 신의 영역에 도전할 뜻을 품게 된다. 방대한 양의 지식을 가졌지만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던 두 사람은 그 이후 서로를 쫓고 쫓는다. 빈센트는 그의 출생을 막기 위해 고문하여 죽인 것도 모자라 그가 다시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내내 그를 추적한다. 그 와중에 이미 빈센트는 클럽을 와해시키고 발전을 당기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해리가 빈센트를 저지하여 클럽을 지켜내고 자신의 삶을 다시 찾게 되는 과정이 쉴 틈 없이 전개되지만 과연 누가 옳고 그른 일을 행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해리 그가 과연 인류를 구할 열쇠일까.

타임 루프 안에서 특정한 일의 순서를 변경할 경우 그 시간대가 혼란에 빠지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해리의 삶은 늘 변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경우는 많지 않다. 연쇄살인범을 미리 죽여서 피해자들의 삶을 연장시킨다거나 미래를 이용해 자금을 마련하고 신분을 세탁하며 옮겨 다니는 일이 능숙해진다. 단지 사랑하는 여인을 빈센트에게 빼앗겨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의 삶은 그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해리가 인류의 종말을 저지하기 위해 삶의 패턴을 재구성하는 동안 논리성이나 드라마틱한 전개는 다소 떨어진다. 좀 더 기계적인 느낌이 강했던 건 그의 실수 없는 삶 때문일 것이다. 그의 고통에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봄직한 소재를 흥미롭게 구성하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해서 좋았다. 과학의 발전과 인간의 행복은 비례하지 않으며 인류의 이기심은 결국 세상의 종말이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짐을 일깨운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법이고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임을 일깨운다. 특히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혼돈의 상태에서 많은 이들이 위태로운 삶을 겪게 된다.

우습지만 책을 덮고 나니 미래를 예언한 노스트라다무스나 인류의 발전에 공헌한 유능한 CEO를 떠올리면서 그들이 기억술사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리고 하나 더 사람에게 망각의 능력은 꼭 필요하다. 저렇게 모든 걸 다 기억하는 해리가 참 힘들 것 같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것도 죄악이고 외로울 것 같다. 나에게 저런 능력을 준다고 한다면 나의 대답은 NO다. 만물은 끊임없이 변할것이고 선형적인 인간은 단 한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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