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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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게으름뱅이 하면 혀부터 차게 된다. 게으른 놈이 어느 곳에 지 한 몸 거두겠는가. 그러나 여기 거룩한 게으름뱅이가 있다. 게다가 게으름뱅이가 모험도 한다. 게으르면 아무것도 안 해야 되는 게 맞을진데 모험을 해서 거룩하다는 건지 너무나 게을러서 거룩하다는 건지 어쨌든 게으른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겐 낯선 작가이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인지도가 있는 작가로 마니아층이 있나 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떠오른 표지와 캐릭터들이 일본의 고유문화와 연결되어 독특한 괴이함을 자아낸다. 특히 교토 책 대상을 받았다는 문구가 눈을 사로잡았는데 배경이 교토다. 교토 홍보용으로 괜찮았나 보다. 뭐 일본 땅 한번 밟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교토가 어떤지 알 도리는 없지만 작가가 교토의 지리적 특징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교토 여행지 책자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교토는 여행 중 순서나 방향을 잘 짜놓지 않으면 같은 곳을 빙빙 도는 수가 있다는 점말이다. 우습게도 이야기에서도 심한 길치 아가씨가 등장하는데 도통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모습에 동병상련이 느껴지기도 했다.

게으른 주인공답게 느지막이 등장한 고와다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재밌고, 지루함마저도 충만하다고 말하는 청년이다. 나름 주 중은 성실히 보내는 듯도 하다. 그러나 주말만은 기숙사에서만 늘어지게 보내고 싶어 한다. 그 정도의 바램을 원하는 이는 흔하지 않나? 단지 문제라면 '장래에 아내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 목록'을 너무 심각하게 오래 고민하는 것 정도랄까. 하지만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충고하고 제안한다. 토요일도 충실히 보내야 보람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그런 그에게 서서히 모험의 징후가 시작된 건 폼포코 가면과의 만남 뒤부터다. 폼포코 가면은 너구리 가면과 망토를 뒤집어쓰고 정의를 위해 활약하는 귀인인데 다시 보니 그런 희생의 즐거움에 취해 너무 모험이 과한 자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일까 체력도 딸리고 슬슬 후계자 고민을 하던 차 그는 고와다를 점찍는다. 수많은 성실한 이들을 재껴두고 왜 고와다일까, 하니 훌륭한 모험가 눈에 비친 고와다는 삶을 포기한 자로 보였나 보다. 즉 인생 구제라고 나 할까. 매사가 게으르고 지루해 보이는 그에게 모험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주고 싶어 한 것이다. 그러나 태생이 게으른 그에게 모험이라니. 먹혀들 리가 없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그들의 밀당이 우습기만 하다.
"저는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 서면 뭐든 합니다."
"당신 또 그런 소리를! 좀 더 모험하라고!"
"그런 건 싫어요." -p.179

여전히 폼포코 가면은 본연의 주어진 임무에 바쁘다. 그러나 어딜 가나 그런 귀인을 달가워하지 않는 무리가 존재하듯이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돼있는 이들도 있다. 국숫집에서 한바탕 소동을 시작으로 줄기차게 쫓는 자들이 따라붙고 탐정 사무소 여직원인 다마가와는 폼포코와 함께 있던 고와다까지 미행을 한다. 물론 타고난 길치라 미행은 실패하고 그와 동행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폼포코 가면을 잡으려는 이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게도 배후를 밝힌다. 캐도 캐도 계속 나오는 배후들. 왜 귀인을 못 잡아 안달인 걸까.

여기서 나는 고와다보다는 탐정 직원인 다마가와에게 더  마음이 움직였는데 서툴러도 어쩌면 제일 성실한듯하고 맡은 일에 충실하다. 엉뚱해 보이지만 결정적 단서도 제공하는 등 이야기의 중심을 잡고 있다. 그렇게 교토를 돌고 도는 사이 어쩌다 보니 고와다도 소소한 모험의 연속이다. 소설은 일본의 축제 요이야마와 하치베묘진이라는 신을 등장시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러한 느낌이 배가 되는데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흥미롭다.

처음엔 소설이 참 게으르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별로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두 번 훑어나가면서 장면 장면이 머릿속에 들어오고 웃음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게으른 고와다는 모험 인듯 아닌 모험을 통해 폼포코 가면으로 오해를 받게 되어 붙잡히게 되는데 결국 배후의 우두머리인 하치베묘진을 만난다. 이 신이 얼마나 게으르고 더러운지 고와다의 입에서 절로 게으름뱅이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다. 오십 년이나 한 곳에서만 머무르고 쓰레기 버리는 것도 귀찮아 쌓아두며 지루한 건 싫지만 귀찮은 건 더 싫은 신!이라니. 그러고선 귀찮아하는 신은 더 귀찮아하는 고와다에게 청소를 시키려 한다.
여기선 고와다와 하치베묘진의 밀땅이 더 우습다.
"좋아, 알았어. 거기에 작은 서랍이 있지? 돈이 조금 들어 있어.
오래된 돈이지만, 알지? 그런 편이 가게에서 비싸게 팔리기도 한다며? 전부 줄 테니 일해다오."
"싫습니다."
"인간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지 않나? 우리랑 다르게."
"저는 인간이기에 앞서 게으름뱅이입니다." p.368

무심코 읽다가 나도 모르게 빵 터졌는데 이 장면에선 유독 일본 애니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아, 그래서 거룩한 게으름뱅이라고 한 건가 하는 의문도 풀리는듯했다. 신보다 더 확고한 게으름뱅이라니.ㅋ
그렇게 폼포코 가면의 후계자 따윈 전혀 생각지 않고 있던 고와다가 과연 하치베묘진까지 만나며 생각을 바꾸게 될는지. 그리고 과연 그에게 휴일의 빈둥거림이 계속 이어지게 될는지 소설을 통해 만나보길 바란다.

뭐니 뭐니 해도 그의 거룩한 게으름을 대변하는 문장은
"지루함의 바닥까지 느껴야 진정한 휴가지." -p.134라는 말이 아닐까.
그러나 "아아, 나는 이제 의미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p.135에서는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겪어본 바로는 주말을 지나치게 굴러다녀서 더 피곤한 월요일을 맞이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인데 적당한 게으름뱅이라면 삶의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여전히 직장인과 학생들은 일요일저녁이면 두려워한다. 내일이 월요일이란 사실을.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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