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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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예방접종 수첩에서나 보았던 단어, 폴리오.
과연 책 속에서 폴리오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왔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단어가 주는 공포감에 익숙해지자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은 전쟁 트라우마와 같은 상흔을 남길 수도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또 다른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라는 비디오 광고 문구가 익숙한 세대라면 전쟁과 질병은 거의 동급 수준의 공포감을 지닌 존재임을 알 것이다. 죽음을 부르는 바이러스의 공포는 인류를 지속적으로 떨게 했으며 백신이 개발되기까지 수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갔다.

최근에도 우리는 신종플루나 메르스 등 각종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감을 경험한 바가 있다. 그래서 더더욱 인간이 재앙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음을 잘 안다.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건 불신과 증오의 확산이다. 질병으로 인한 공포가 그보다 더한 공포를 불러오는 셈이다. 그런 환경에 노출되었던 사람들 중 과연 누가 누구를 가해자로 피해자로 규정지을 수 있을까.

때는 2차 대전 막바지, 전쟁터에 자식들을, 그리고 이웃들을 빼앗긴 이들에게 이제는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노리는 질병이 퍼져나간다. 이야기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아이들의 바깥활동이 염려스러울 만큼 달아오른 미국 뉴어크. 그 마을에서 캔터는 체육교사로 아이들을 관리 지도하고 있다. 친구들은 이미 전장으로 떠났지만 유독 시력이 나쁜 이유로 그는 갈수 없었다. 건장한 그에게 그것은 늘 수치심이다.

이미 마을 주변은 폴리오 소식으로 뒤숭숭했고 이곳의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을 아이들이 하나둘씩 감염되고 죽음을 맞는다. 굳건했던 마음도 지독한 더위와 부모들의 원망에 흐려지고 만다. 그리고 때마침 인디언 캠프에서 일하던 연인의 제안으로 그곳으로 떠난다. 하지만 홀로 도망쳤다는 죄책감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매시간이 혼란스럽다. 그리고 모든 원망은 서서히 신께 옮아간다.


" 하지만 행복을 느낄수록 수치심도 강해졌다."



그는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우리 모두가 환경의 힘 앞에 이렇게 무력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여기 어디에 하느님이 개입하고 있단 말인가?
하느님은 왜 한 사람은 손에 라이플을 쥐여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 내려보내고
다른 사람은 인디언 힐 식당 로지에서 마카로니와 치즈가 담긴 접시 앞에 앉아 있게 하는가?
하느님은 왜 위퀘이크의 한 아이는 여름 동안 폴리오에 시달리는 뉴어크에 놓아두고
다른 아이는 포코노 산맥의 멋진 피난처에 데려다 놓는가?
이전에는 부지런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에서 자신의 모든 문제의 해법을 찾았던 사람에게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 왜 지금처럼 일어나고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 - p.156∼157

하느님 이야기를 하자면, 인디언 힐 같은 천국에서 하느님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1744년 여름 뉴어크에서는 -혹은 유럽이나 태평양에서는-그렇지 않았다. -p.179

그는 떠나왔지만 비난의 목소리와 그를 신뢰하던 아이들 생각에 뒤죽박죽 혼란스럽다. 그는 그만큼 책임감이 강하고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캠프장에서 폴리오 환자가 발생하고 그가 보균자란 사실이 밝혀진다.

어차피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그 상황에서 내가 굳건히 믿고 있던 신념들이 무너지면 신의 존재도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내내 캔터가 안타까웠고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인생의 뒤편으로 숨어버려도 그를 이해했다.
그러나 작가는 마지막에 가서 새로운 화자를 등장시키며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폴리오를 앓았고 제자였던 그는 캔터와는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어쩌면 캔터로 인해 병을 얻었을지도 모를 그였지만 사랑하는 아내도 있고 스스로를 극복하며 생을 살아내고 있다. 이는 캔터와는 너무나 정반대의 삶이었기에 그 시점부터 또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여태 한 남자가 재난 앞에서 어떤 인생의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에 대해 할애하다가 트라우마를 이긴 쪽과 그렇지 못한 두 가지 상황 앞에 놓였으니 말이다. 내내 캔터를 두둔하고 있었는데 화자를 보니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신을 향한 원망은 캔터의 태생과 가정환경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그는 신 앞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에 놓인 것 같은 복잡함에 놓인다.
결국 자책감으로 자신을 가두어버리고 연인과의 행복마저 포기해버린 그.
화자의 등장으로 인해 그는 그의 선택을 후회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캔터의 선택이 마냥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캔터는 화자를 통해 조금의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자신보다 나은 생을 살고 있는 그를 보면서.

불완전한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삶에 대해 자부심과 책임감이 강했던 그였지만 폴리오로 인해 무너지면서 잘못된 책임감을 떠안았다. 자기의 고집스러운 판단이 때로는 자신에게 독이 됨을 깨달았어야 했다.

우리는 아무런 근거 없이 우리 자신을 가혹하게 심판하기도 해.

하지만 잘못된 책임감은 사람을 쇠약하게 만들 수 있다네. -p.107

'어쩌면 그가 실제로 보이지 않는 화살이었을지도 모른다'라는 화자의 말을 곱씹어 보니 나의 좌우명이기도 한 '너 자신 외에 너에게 상처 입힐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해 보인다.
불가항력의 재난 앞에 인간과 신의 관계를 따져 묻다 또 다른 화자의 시선을 내세워 결국 말하고자 한 것은 결국 믿을 건 자기 자신뿐이라는 깨달음이다.
물론 인생의 다양한 변수앞에 한결같은 깨달음을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게 나의 일이 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인생의 길은 주어져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 바로 길임을 안다면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때로는 불리한 상황에서 조금 내려놓았을때 오히려 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경우를 경험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운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누구의 인생이든 우연이며,

수태부터 시작하여 우연-예기치 않은 것의 압제-이 전부다.
나는 캔터 선생님이 자신이 하느님이라 부르던 존재를 비난했을 때 ㅡ가

정말로 비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p.243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고요. -p.273

한가지 덧붙이자면
네메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으로 모든 ‘과도함’, 즉 지나친 행동이나 오만(히브리스)을 벌한다. 라고 나와있다. 그렇다면 캔터가 자기 자신에게 내린 가혹함으로 벌을 받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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