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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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면 결심은 무뎌진다. 돌고 도는 일상에 정신이 노곤해지면 독서의 패턴도 둔해진다. 그러다 여름이란 제목에 이끌려 찾아들어간 포스팅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강렬한 피톤치드 향내가 날것만 같은 표지는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여름을 소재로 한 몇 권의 책을 들였고 이 책을 제일 먼저 펼쳤다.

졸참나무의 장작은 향기로운 냄새가 났고,
가끔 섞인 벚나무 장작에서는 희미하게 달콤한 냄새가 풍겨 팽팽하게 긴장된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 p.35

불멍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난 얼마 전 떠났던 첫 캠핑에서 그 단어를 알게 되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을 보며 멍 때린다는 것의 줄임말이다.
불꽃은 장작과 장작 사이에서 태어나는 덧없는 생물 같았다.  - p.41
이렇듯 불멍을 하는 동안 덧없는 생물 같아 보이는 불꽃에도 금세 취한다. 장작 타는 소리에 마음은 고요해지고 불꽃이 일렁이며 뿜어내는 온기에 엔돌핀이 도는 것 같다. 어둠을 둘러싸고 빛 안으로 모여드는 이야기들은 마치 타다 남은 불씨처럼 오랜 여운을 남긴다. 내게 있어 이 한 편의 추억이 그런 잔상을 남겼다.

온갖 새소리에 잠을 깨어 연필 깎는 소리로 아침을 시작하는 곳. 다른 설계 사무소와는 다르게 세월을 조금 비껴가고 있는 듯하지만 건축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진 이들이 몸담고 있는 곳. 이곳은 무라이 설계사무소다.
화자인 사카니시군은 무라이 슌스케를 동경하는 건축학도이다. 조용하고 심심한 청년이지만 건축에 대한 열의와 소신이 비친 걸까. 무라이 설계사무소에서는 더 이상의 직원 채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인다. 그의 입사에 맞추어 사무소는 여름 별장으로 일감을 옮겨 온다. 그리고 무라이 선생의 국립 현대 도서관 설계 경합에 대한 플랜이 통보되자 별장은 분주해진다. 무라이 선생은 종교가 없음에도 교회 건축에 혼신의 힘을 다한 분이다. 그러니 책을 사랑하는 선생이 그려내는 도서관에 대한 기대감은 커져갈 수밖에 없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중요하지. 아이들에게도 똑같아.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 책의 세계에 들어가지.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아이가 그것을 스스로 발견한다면 살아가는 데 하나의 의지처가 되겠지. p.181

그렇듯 이야기는 경합 준비로 분주했던 별장에서의 일 년 남짓한 시간을 담고 있다. 무라이 선생의 차분한 기운 때문인지 그리 모난 인물도 없는 듯하고 떠들썩한 사건도 없다. 별장 주위의 느긋한 공기를 타고 그들의 순간이 흘러갔고 호흡도 느려졌다. 비록 그들의 열정이 빛을 보진 못했지만 무라이 선생의 건축을 향한 심도 있는 철학을 맘껏 느껴볼 수 있으며 별장안을 가득 메운 장작 냄새와 커피 향기를 상상하며 힐링할 수 있었다. 여름 별장에서의 경합 준비보다는 자연과 어우러진 아날로그적인 그들의 일상에 향수를 느꼈다.

이토록 이야기에 심취할 수 있었던 것은 풍요로운 묘사 덕이다. 지나침이 없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은 풍부한 현실감을 제공한다. 공간 감각이 떨어지는 나로서는 자세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곳도 있었지만 섬세한 장면 묘사도 으뜸이다. 그렇게 천천히 다른 책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동안 내내 평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갓 구운 스콘에서 나는 밝고 마른 햇볕 냄새가 궁금할 정도로 그의 문체가 좋았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숲속 여름 별장 주위를 오고 가는 새들의 속삭임, 화산 주위를 돌아다니는 연기의 움직임, 어둑한 밤공기 사이를 틈틈이 빛내고 있는 반딧불이, 그리고 몽당연필이 가득 든 유리병들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한 힐링의 공간에서 보이는 건축의 정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본 건축의 자부심과 장인정신이 엿보이기도 했다.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 p.180

건축에서의 기술적 요소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인간의 실생활을 반영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소한 것에서부터 철학을 배운다. 천장의 높이, 침대의 위치, 열고 닫는 문의 방향과 손잡이 하나까지도 뜻이 숨어 있다. 집이라면 무조건 튼튼하고 견고해야 한다고만 여기고 있던 생각에 무라이 선생의 한마디에 섬뜩한 기분도 들었다.

불탄 들판에, 외롭게 자기 집만 남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봐.
주위 사람들은 많이 죽었어. 이쪽은 인명은 물론 가재도구도 전부 무사해.
이건 말이야, 견디기 어려운 광경이야. 그런 사태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을까? - p.202

인생이란 언제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알 수 없다. 돌발변수를 제공했기에 이야기가 더 깊이감 있게 느껴진 건 아닐까. 그렇게 살다가는 사람들. 그 자리를 지키다 흩어진 사람들. 그러나 각자의 삶의 축을 놓지 않고 서로 연결고리를 지켜나가고 있는 인연들. 그런 소소한 일상에서 삶의 흐름을 읽었다. 비록 우유부단함으로 그의 첫사랑은 비껴갔지만 한 손에 의지한 채 어둠을 함께 걸었던, 목소리에 반해 그 목소리를 모아두고 싶다던, 함께 사무실 동료들의 식사를 준비하며 새와 풀벌레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녀가 곁에 남아있어 행복해 보였다.

그 시절, 그해 여름 별장에서의 시간이 오래 머문 것은 무라이 선생의 모든 것이자 마지막이었던 플랜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치 거미줄을 걷어내듯 멎은듯한 시간을 걷어낸 별장에서 그의 다음 플랜은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 귓가에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다가오는 주말은 불멍하러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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