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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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엄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이야기의 진실성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현실주의에 입각한 나의 의심병이 과한 건 아닐까 하며 흘려들은 적이 많았다. 그런데 여기 이 두 늙은 여자의 이야기는 나의 잣대로 본다면 더 믿기 어렵다. 매년 겨울이 돌아오면 보온성이 뛰어난 외투를 걸치고도 수족냉증으로 호들갑을 떠는 내 모습과는 극명해 보여서일까. 여든 살과 일흔다섯의 두 노인이 혹한의 추위를 이겨내는 모습이 경이로워 보일 정도였다.

매서운 칼바람에 온몸이 얼어버릴 것 같은 겨울. 이동하던 유목민들 사이에서 두 늙은 여자가 버려진다. 모닥불 주위로 숨죽이고 있던 부족민들은 혹독한 추위와 기근을 원망하며 두 노인을 외면한다. 애초부터 그들에게 연장자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매서운 알래스카의 추위 속에서 그 잔인함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 누구도 그해 겨울을 이겨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고 암묵적 생존법칙이 공동체에 적용되고 있었다. 늙고 쓸모 없어진 그녀들도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멍하니 모닥불만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도 지금까지 주어진 일을 해나가며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나 점점 몸은 누군가의 팔이나 지팡이에 의지하게 되고 정신은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나약함을 드러내는 일이 일상이 되고 게다가 불평불만도 많아진다. 결국에는 그것이 그녀들 스스로 쓸모없음을 드러낸 꼴이나 다름없었다. 족장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건 입의 수를 줄이는 것이었고 그녀들은 부족의 운명과 함께할 수 없게 된다.

부족민들이 멀어져 갈수록 그녀들은 배신감과 치욕감 그리고 서러운 감정들이 뒤범벅되어 눈물이 솟구친다. 칙디야크와 사, 이 두 늙은 여자의 운명은 이제 시퍼런 대지 위에 내던져진다. 칙디야크가 딸을 향해 원망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사이 사는 분노를 억누르자 오기가 발동한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뭐라도 해서 그들이 틀렸음을 증명하자고 단호하게 말하며 그녀들이 버려진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자 한다.

우리 역시 지난날 열심히 일했고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잊어버렸어!
그래서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친구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게 아니라 말이야. -p.29

 

 

요즘 부쩍 이 늙다는 어감이 가져다주는 서글픔과 노인에 대한 연민이 생겨나는 이때에 두 늙은 여자의 생존기는 그 어떤 자기 계발서보다 강하게 다가왔다. 관절이 얼어붙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순간을 버텨내고 한방의 손놀림에 다람쥐 사냥은 성공한다. 덫을 놓아 토끼를 잡아서 주린 배를 달래는 사이 세월과 함께한 삶의 지혜들로 자신감을 얻는다. 살고자 하는 바람을 대지가 눈치챈 것일까. 밀당의 고수 같은 자연도 그녀들의 의지에 희망을 봄바람을 실어 온다.

칙디야크와 사는 자신들이 힘든 노역이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대지가 그 대가로 자신들에게 안락을 준다는 자연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 -p.61

어쩌면 그녀들에게 한줄기 희망은 죄책감을 안고 떠난 부족민들이 남겨준 물품들이었을 것이다. 칙디야크의 딸과 손자가 놓고 간 가죽끈과 손도끼는 그들에겐 연민의 정이자 중요한 생존도구였다. 여성들은 사냥을 제외한 실생활에서 기술이 능할 수밖에 없다. 칙디야크와 사는 옛 기억을 떠올려 머물 곳을 찾아내고 그곳에서 각자의 삶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열심히 움직인다. 그렇게 구한 식량을 저장하는 문제로 고심할 정도가 되자 한편으로는 자신을 버리고 간 부족들을 경계해야 함을 잊지 않는다. 두 늙은 여자는 자신들이 결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였지만 배신의 그림자는 그들의 생명이 붙어있는 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혼자가 아닌 둘이라서 가능했을 땅 위의 시간 속에서 어둠이 내려앉으면 어김없이 자신들을 외면했던 눈빛의 잔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긴 세월 동안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웠어. 하지만 노년에 들어서자 우리는 삶에서 우리의 몫을 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더 이상 전처럼 일하기를 그만두었어. 우리의 몸은 우리의 예상보다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직 건강한데도 말이야. -p.44

노년 인구가 증가하고 노년의 삶을 다룬 소설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노년의 억척 성장기를 말하고 있는 소설은 많지 않다. 게다가 더 많은 깨달음도 보였다. 요즘처럼 세대 간의 단절이 심화되고 공감력이나 연민이 부족한 때에 노년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단지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로 답답하다 말하고 사회 일원으로 배제하려고만 한다면 불협화음이 여기저기서 생겨난다. 그래서 그녀들이 생존에 열의를 쏟아부을 때는 영화 [인턴]이  떠올랐다. 노년의 인생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며 젊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주었던 유쾌한 장면 장면이 떠올랐다. 인생 선배로써 젊은이들 사이에서 잘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훈훈했고 결코 쓸모없는 인간이란 없음을 느끼게 해 주었던 영화였다.
그처럼 노년이 되어서도 늙음을 탓하지 말고 삶에 애정을 쏟는다면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부족의 젊은 남자들이 그녀들을 발견하였을 때 느꼈던 희망과 존경심처럼 말이다.

작가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었다. 쓸모없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에게 내재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귀차니즘이 점점 커져가고 새로운 시도에 두려움만 가졌던 나를 질타하게 해준 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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