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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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를 때 제목만 보고 선택할 때가 있다. 어차피 책의 저자도 생소했기에 재미보다는 작가의 세계관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다. 책을 덮고 떠오른 이미지는 고즈넉한 숲속을 산책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느낌이랄까. 자카란다 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거리와 저택의 정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허브향기에 살짝 취해 이야기의 반은 밋밋하게 흐르며 단서는 독자를 끌고 나가지만 조급함이 없다. 그러나 결정적 한방은 독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야기는 자연이 비치는 정직함만큼 착한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해피엔딩이라서 만약에라는 가정이나 더 이상의 의문을 달지 않는 게 산뜻하다.

일본을 떠나 아메리칸드림에 성공한 기쿠에는 삶의 마지막을 고국에서 맞게 된다. 그녀의 막대한 유산을 조카인 겐야에게 남긴 채 말이다. 이쯤에서 그녀가 부유했지만 외로운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것이 아닐까 했다. 소설은 겐야가 고모의 과거를 찾아 감춰진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갑자기 자신에게 떨어진 어마어마한 유산보다는 유언장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에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어렸을 때 병으로 죽은 줄 알았던 고모의 딸이 사실은 실종되었고 고모는 그 딸을 찾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집안 곳곳에서 발견되는 단서들은 여러 가지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과 뒤섞이고 겐야는 멜리사를 찾아보기로 한다. 그것은 마치 고모의 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감이랄까. 정원 곳곳은 고모가 만든 세상이고 그녀의 흔적이다. 풀들과 꽃들이 품어내는 기운들은 레일라의 생사와 안전을 소망하는 바램의 목소리 같기만 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준 비밀의식에 장단을 맞추어 마음을 풀들에게 전해본다.

수목의 가지와 잎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겐야의 청각에 닿는 것은 좀 더 부드러운, 속삭이는 목소리인 듯한, 마음을 가진 생물의 말이었다.
조금 전부터 겐야 안에서 조용히 계속되던 공포는 사라졌다.
겐야는 중정을 걸어가 꽃들을 바라보며,
"예쁘구나. 정말 예뻐."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 P.62

고모의 집 곳곳에서 나오는 단서들 중 비밀 박스에서 발견된 편지에 서서히 윤곽은 잡혀가고 레일라의 생사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려나가는 사이 겐야는 고모가 만들고 싶어 한 잔디정원을 완성할 결심을 한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는 여러 가지 사실들 또한 삶의 일부 여야만 하는 사실이 안타깝다. 미국에서 발생하는 실종아동의 통계수치 및 사망자 수, 인종차별, 가정폭력, 아동 성범죄 등 다소 무겁고 가슴 아픈 내용들이 흘러가지만 간절한 용기 위에 살아남은 소중한 이들의 인생에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과거 속 진실의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신 수목과 꽃이 많은 거리와 다양한 식물들이 내뿜는 기운을 느끼며 기쿠에 고모가 만든 수프의 맛을 음미하였다. 그래서 이 소설은 천천히 수저를 뜰 수밖에 없는 그런 소설이었다. 겐야는 진실과 마주했고 감사함을 느낀다. 뜻대로 풀리지 않던 그의 삶도 그 과정에서 주변인들이 보여준 따뜻한 마음들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가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서정성에는 덜 미친다는 옮긴이의 평이 있으나 미야모토 테루라는 작가의 세계관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요즘의 나의 마음과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이다. 자연과 함께 하는 삶, 주위를 돌아보면 자연에서 얻는 깨달음이 정말 많음을 많은 이들이 알아갔으면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기쿠에 고모가 아주 어렸을 때는 '풀꽃들에게는 마음이 있다'라는 할머니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깔보는 듯이 대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사건과 조우했다.
아마 그것은 레일라에 대한 이언의 수상쩍은 행위에 괴로워하는 기쿠에 고모에게 내려앉은 불가사의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p.396

겐야는 발소리를 죽여 오솔길을 걸어가며 계속 풀꽃들에게 감사의 말을 속삭였다.
사람에게도 이 정도의 마음을 담아 고맙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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