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해피엔딩으로 만나요]를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샤를로테 루카스라는 필명으로 접했기에 표지를 들추고서야 같은 작가의 작품인지 알았다. 이 책은 그녀의 세 번째 소설인듯한데 솔직히 필명으로 읽은 두 권의 책보다는 별로였다. 2012년도에 먼저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 속에 삶의 교훈은 뒤로한 채 여주인공을 참아내야 했다.

성인이라면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십 대 초반도 아니고 스물아홉이나 먹을 동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고 있는 찰리를 공감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 모든 장치는 그녀가 기억을 지우기 전과 후의 극명한 대비를 염두에 둔 설정이라고 할지라도 찰리의 인생은 질 나쁜 사춘기 시절을 여전히 통과 중인듯하다. 원나잇을 즐기고 헤픈 여자가 쓰인 티셔츠가 자신의 맞춤복이라고 여기는 모습은 그녀의 낮은 자존감을 덮고 있는 허울일 뿐이다. 게다가 그녀는 그것이 삶의 자유로움이라고 여기며 상당히 즉흥적이고 저돌적이다. 민망하다 못해 슬슬 짜증을 유발하는 민폐 캐릭터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찰리를 깎아내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그냥 일회성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하지만 음악으로 위안을 얻고 산다. 그러나 노랫말에 위안을 얻지만 인생의 변화는 없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어떤 소설보다 노래가 많이 등장한다.
찰리는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술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그것만 보면 크게 잘못된 인생은 아닌듯하지만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없다. 부모님을 속였고 미래의 계획도 없이 오늘만 산다. 절친의 애인과도 원나잇을 하고 변변한 연예 경력도 없다. 그래서 그녀를 각별히 챙기는 술집 주인인 팀의 행동도 눈치채지 못한다. 사춘기 시절 첫사랑과의 창피한 기억과 배신의 아픔은 그녀의 이성관을 무너뜨렸고 그것이 그녀의 인생의 트라우마로 남은듯했다. 그러던 중 뜬금없이 날아온 동창회 소식과 함께 갑작스레 첫사랑인 모리츠가 찾아온다. 기억이야 어찌 되었든 눈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짓는 그 모습에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낀다.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은 그녀를 동창회 장소로 이끈다. 나름 잘 보이고픈 마음에 맘껏 꾸미고 등장했지만 그녀는 낯선 이방인으로서 철저히 이용당하고 모욕당한다. 그녀의 기억 속에 지워버리고픈 악몽으로 남은 것이다.

바닥을 뚫다 못해 땅속으로 곤두박질쳐버린 인생, 그 누구의 위로 따위도 통하지 않던 순간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유혹을 뿌리치기엔 그녀의 인생은 처참했고 새로운 생을 살고픈 욕망은 강렬했다. 그래서 pink의 Don't let me get me는 정말 적절한 선곡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본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기억은 지워졌고 삶은 180도 달라져 버렸다. 원하는 모든 것이 세팅된 삶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니코틴에 중독된 몸뚱어리처럼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인연들을 강렬히 원하고 있었다. 행복하다고 쇼를 하기엔 추억이 없는 거짓 삶 속에서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모든 실수는 단순히 기억을 지운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님을 깨닫고 지워버린 기억을 되찾으려 한다. 찰리는 그녀의 티셔츠에 헤픈 여자 대신에 어떤 문구를 새겨 넣게 될까.

소설은 로맨스물이라기보다는 성장소설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녀가 저지르는 실수와 거침없는 행동들을 감내했다. 누구나 실수를 반복해가며 자신의 인생을 다져나간다. 일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겐 그녀를 감내하고 이해하는 팀이 있었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안 그녀는 첫사랑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물론 기억을 지운 인생에서 뼈져린 경험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가끔 만약 이랬다면 인생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것이 미래의 만약이 아닌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 만약이라면 대부분 부정적인 생각에서 출발한다. 당연히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실수는 인생 실패가 아니다. 실수는 언제든 만회할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선택도 내 몫이고 책임도 내가 해야 할 몫이다. 그래서 실수로 인해 인생을 내팽개치는 일은 없어야겠다. 인생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영향은 받을 수 있어도 내 삶의 운전대는 내가 잡아야 하니까.

그러니 부모님이 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가장 중요해.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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