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이 의문에 답하기 전에 잠시 이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도대체 역자 후기를 왜 쓰는가!
아니다. 이 질문은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다.
도대체 역자 후기를 왜 쓰라고 하는가... 그렇다 나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번역이라는 작업은 참으로 지난하다. 번역은 필사와도 비슷하다. 일단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옮겨 적는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언어에서 저 언어로 옮기기까지 해야 한다. 그러니 몸만 피곤한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 무지막지 피곤하다. 하루 종일 앉아 자판을 두드려도 과연 몇 페이지나 옮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마감날짜는 빛의 속도로 날아오고 내 작업 속도는 마감을 향해 굼벵이처럼 기어간다. 그렇게 어째저째 작업을 마치고 한참 있으면 교정지가 날라온다. 그 교정지를 읽고 수정하고 돌려보내면 비로소 '역자 후기 타임'이 돌아온다.
도대체 역자 후기를 왜 쓰라고 하는가. 여기 서재도 그렇고 책 좀 읽으신다는 분들의 블로그를 돌아다니다보면 종종 이런 글을 읽는다. 도대체 역자 후기는 왜 쓰는가. 번역하느라 힘들었다니, 감동적이었다니, 일독을 권한다느니 이런 말을 굳이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역자후기라는 코너에서 지리멸렬하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것이 알고 싶다!!!
번역을 끝낸 역자들의 감상은 모르긴 몰라도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내 친구 어머님은 국어 선생님이셨다. 은퇴를 하신 후로도 항상 책을 가까이 하시고 즐기시기에, 졸역이지만 책이 나올 때마다 친구를 통해 보내드리곤 한 적이 있었다. 출판 쪽으로 방향을 튼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처음으로 소설을 맡았는데, 책이 나오자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선물해드렸다. 나중에 친구가 전해준 말로는.... "걔는 이렇게 지겨운 책을 번역을 하려면 얼마나 힘들었겠니.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데." 이렇게 내 걱정을 해주셨다고 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다. 사실 그 책은 읽기 전에 '이 책을 재미있게 읽고 말테다'라는 마음의 준비를 굳게 하지 않으면 좀처럼 재미를 느끼기 힘든 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재미있었다. 번역을 하면서 읽고, 번역을 마치고 글을 다듬으면서 최소 세 번은 읽었다. 교정지를 받고 또 읽었다. 대여섯번은 읽었지만, 나는 재미있었다!
원래 그런 법이다. 아무리 지겹고 재미가 없어 보여도 역자 입장에서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 읽다보면 다 재미있다. (물론 내가 경제학 책이나 어려운 전문서적까지 그렇게 애정하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어차피 내 분야와는 멀리 있으니 상관없으려나.) 그러니 역자 후기에도 이런 말 외에는 별로 쓸 게 없는 것이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음악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도레미파솔라시도' 한 옥타브를 기본으로 반음을 올리거나 내리고 박자를 달리하고 옥타브를 올리고 내리는 것 외에 차이를 만들어 낼 방법이 없어보이는데,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가. 지금 나오는 음악이 아니라 지금까지 나온 음악만 봐도 그 수는 어마어마하다. 어떻게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역자 후기는 전 세계에서 인류가 만들어 낸 음악과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본질적으로 똑같은 일을 하는 것 같다. 글을 쓸 도구는 가나다라마바사....로 한정되어 있고 내용도 정말 재미있어요 꼭 읽어주세요. 우리 이 감동을 함께 해요... 지만 역자들은 지금도 색다른 역자후기를 쓰느라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것이다. (술술 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안 쓸 수는 없는 일. 쓰라고 하니 써야 하는데, 정말 쓸 내용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탐정 매뉴얼>을 작업한 후 나는 이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 솔직히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갈피를 못 잡고 있으니 편집자분께서 이런저런 내용으로 써보면 어떻겠냐고 도움도 주셨다. 보통은 그런 방향을 정해주면 어떻게든 글을 쥐어짤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보잘 것없는 글재주는 차치하고라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른 작업을 마감을 하던 때라 되도록이면 그 원고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직전에 읽은 어떤 책의 역자후기가 너무 훌륭해서 야코가 죽었다고 해야 할까.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니 단단히 비교가 되겠구나 싶어 지레 겁을 먹은 탓도 있었다. 바로 이 책이었다.
작가의 후기인지, 역자의 후기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작품과 혼연일치를 이루었다고 해야 할까... 짧은 글이지만 주인공인 이즈미 로안의 모습과 기담의 분위기까지 제대로 재현을 하면서 수록된 단편에 대한 역자의 감상과 나름의 분석까지 근사하게 전하는 실로 훌륭한 역자후기였다.
이런 수준의 역자후기를 쓸 능력이 없다면 적어도 비교가 되는 것만은 피하는 것이 상책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결국 배를 째라며 출렁이는 뱃살을 편집자님에게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탐정 매뉴얼>에는 역자 후기가 없다...가 아니라 후기를 못 넣었다. 정말 재미있어요. 많이 읽어주시면 좋겠어요.라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이 책 재미있습니다. 색다른 탐정의 모습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길지만 순식간에 읽힐 걸요.... 궁서체임.)
물론 나도 뱃살을 들이대며 안면몰수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써보려고 애를 쓰기는 했다. 가령 탐정이 나오는 작품이고 제목에도 탐정이 들어가니까 '탐정'이 제목에 나오는 탐정소설들을 묶어서 글을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가령 이런 작품들 말이다.


등등......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탐정 매뉴얼>의 주인공인 언윈은 원래부터 탐정이 아니었다. 탐정회사의 직원이지만 탐정이 아니고 탐정이 준 보고서를 정리해서 사건 파일로 만드는 서기이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음모에 휘말려 얼떨결에 서기에서 탐정으로 승진을 한 것이다. 언윈은 어떻게든 서기로 돌아가 전처럼 조용하게 살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그런데 시체를 발견하고 살인자로 몰리면서 탐정을 찾아내 얼른 사건을 해결하도록 하는 길만이 자신이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갈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서기는 그렇게 탐정이 된 것이다. 그러니 탐정이 아니지만 얼떨결에 탐정역할을 하게 된 민간인들이 주인공인 추리소설들을 잔뜩 모아서 이야기를 풀어보면 어떨까....
그런 작품들은 잔뜩 있으니 말이다.
뭐니뭐니 해도 그런 민간인의 대표라면 이 분... 이 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미스 마플..... 물론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미스 실버도 있고 미스 브래들리도 있고.. 이런 미스들이 많이 계신다. 하지만 미스 마플만큼 유명하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는 캐릭터가 또 있을까. 미스 마플은 그 후로 수없이 많은 '아마추어 (민간인) 여탐정'을 세상에 등장시킨 산파이기도 했다. 이 할머니의 뒤를 이어...
얼마 전에 17번째 번역작이 나왔고, 이번에는 직접 사람을 죽여버린 한나 스웬스 시리즈! 두둥. (나와 내 지인들은 오래 전부터 한나의 정체를 의심해 왔다. 민간인이 평생 시체를 발견할 일이 도대체 몇 번이나 되겠는가. 그것도 뉴욕이나 런던처럼 메트로폴리탄도 아닌 어딘지 지도를 봐도 모를 쬐끄만 도시에서 말이다. 전입인구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사람이 죽어나가다가는 남아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최후에 남는 사람은 한나일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한나의 정체는 실은..... 뭐 이런 농담을 하곤 했었는데, 농담이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도...

등등....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역사적인 인물을 탐정으로 내세운 작품들도 생각났다.
(내가 작업한 책이니 좀 크게..... 전자책으로도 나와 있어요...........)
어디 그뿐이랴.

등등
뭐 이것뿐이랴...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끝도 한도 없다. 나는 탐정이 제목에 등장하는 소설들로 혹은 아마추어 탐정이 활약하는 소설들로, 역사적 인물이 탐정으로 활약하는 소설들로 이런저런 글을 구상해보았다. 그리고 결국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결국 <탐정 매뉴얼>과 나는 역자후기로써의 연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에 쏟은 노력과 애정이 결코 역자 후기를 쓴 책에 비해 덜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훌륭한 작품에 나의 보잘것없는 글이 실려 누가 될까 걱정을 했다면 모를까.
정말 대단한 작품을 작업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작가의 상상력과 필력에 감탄했다. 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아니 뭐 이렇게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있지....라며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점점 작업이 진행되어 이야기가 조금씩 풀려갈수록 언윈이 사는 세상에 점점 더 빠져들면서 소설에 몰입하게 되었다. 뒷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까지 끝냈을 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대단한 작품을 작업하다니. 이게 뭔 복인가. (지금 작업 중인 작품에도 똑같은 생각과 감탄을 한다. 역자는 그런 법이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역자후기가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쓰고 나니 비로소 <탐정 매뉴얼>의 작업을 완전히 마무리지은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가벼워졌다. 안녕, 잘 가요, 언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