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 : 교토의 역사 -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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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 교토의 역사

 

유홍준 

 창비 

 

일본답사기가 이제 교토에 이르렀다.

 

일본을 다녀온 한국인 치고 교토를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한국의 고도(古都) 하면 경주가 떠오르듯이 일본은 교토가 1,000년이 넘게 수도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거리 쓸거리가 너무 많은 탓에 저자는 답사기를 교토의 역사편과 명소편으로 둘로 나눠 서술하고 있다. 모르고 있었는데 교토 역시 나라지방과 마찬가지로 한반도계 도래인의 흔적이 너무 깊게 배어있는 유적도시였다. 신라계도래인 하타씨가 세운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 가쓰라강의 도월교, 청수사, 고구려계 도래인이 세운 야사카신사, 법관사 오중탑, 하타시가 세운 후시미의 이나리신사 등등...

 

그중 광륭사(고류지)는 서기 603년 쇼토쿠태자의 명으로 건립한 7대사찰중 하나로 교토에서 가장 오랜된 사찰이라고 한다. 봉강사, 태진사 등 여러 이름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광륭사로 불린다 한다. 그간 관륭사는 몇차례 소실과 중건을 거듭했지만 전해내려오는 불상과 회화만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영보전에 전시되고 있다. 특히 광륭사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과 매우 흡사하다.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인지 일본 현지에서 제작된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삼국시대 양식임에는 틀림없다. 광륭사의 창건주 진하승과 하타씨들은 교토라는 도시를 고대부터 개척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요즘 한국인 여행기에 거의 나오는 아라시야마 일대 대언천의 재방을 만들고, 이름도 멋진 도월교를 건설한 사람도 모두 신라계 도래인 하타씨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민 1세대인 셈이다.

 

 

일본 삼대 마쓰리중 하나인 기온마쓰리는 야사카신사에서 주관하는데 이 신사는 고구려계 도래인이 세운 신사라 한다. 역시 이들이 세운 법관사는 현재 오중탑(오층탑)만 남아있다. 기온마쓰리는 거의 한달간 계속된다고 한다. 유곽의 거리였던 기온거리는 지금은 식당과 상점가로 변하였지만 요정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교토 남족의 후시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거점이었는데 현재는 붉은 도리이로 유명한 이나리 신사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후시미성은 파괴되어 복숭아밭이 되었기에 그 시대분류명을 복숭아산 즉 모모야마시대라 하고 성의 여러 건물은 고대사를 지을 때 옮겨다 썼다고 한다. 이런걸 보면 유홍준선생 설명의 진가가 두드러진다.

 

 

이나리신사 역시 하타씨 일족인 진이려구가 711년에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이 이나리신사의 강열한 붉은 도리이, 센본토리이는 관광객들이 사진에 담아오려는 단골 출사지인데 히데요시의 후시미성이 몰락할 당시 2,000여명이 할복자살했고 그 피가 나무복도를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다. 그 붉은 나무판자는 후에 재활용되어 삼삽삼간당 옆에있는 사찰을 지으면서 천장목재로 사용했고 이를 피의 천장이라 부른다고. 이 대목을 소개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피의 정서라는 표현을 했는데 자결을 선호하는 일본의 문화가 낳은 한 단면인 듯하다. 피의 천장이라니! 사찰에! 그것도 내력을 감춘 것도 아니고.

 

헤이안시대를 밝힌 고승 공해와 최징 두 승려에 대한 이야기도 상세히 들려준다.

밀교에 대한 설명도 간략하지만 충실하다. 어떤 스님이 이리도 친절하게 정확하게 일본의 불교와 밀교를 설명할수 있겠나. 아마도 없을 듯.

 

히에이잔 연력사의 근본중당에는 최징이 직접 조각했다는 약사여래상이 있는데 비불이라 오늘날까지 공개된 적이 없다고 한다. 일본에만 있는 이 비불의 전통은 대체 뭔지.

영산 히에이잔과 고찰 엔랴쿠지는 내게도 낯설지 않은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했는데 우리나라 사람에게 입당구법순례기로 유명한 원인(엔닌)을 비롯, 임제종을 개창한 영서(榮西)에사이, 정토종의 법연(法然)호넨, 조동종의 도원(道元)도겐, 일련종의 일련(日蓮)니치렌 등이 주요 인물들이다.

 

디디어 교토답사 일번지라는 청수사(기요미즈데라)가 나오는데 이 역시 백제계 도래인 사카노우에가 창건한 절이라 한다. 이 사람이 일본 역사상 최초로 쇼군 즉 정이대장군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현재의 청수사는 1633년 재건된 것이다. 그나마 메이지의 폐불훼석때 거진 파괴되어 15만평의 부지중 14천평만 남았다고 한다. 550년된 청수사의 마굿간은 유야설화와 관련있어 일본인에게는 친숙한 공간이라 마치 우리나라 광한루와 춘향전의 관계 같다고 하는데 나는 이 마굿간을 본 기억이 없다. 이 답사기가 주는 주요한 공능중 하나라 생각된다.

 

교토를 가보긴 했지만 사실 교토를 보았다고 말할수도 없을 정도라 직접 눈으로 보고싶었던 여러 유적유물들을 거의 지나쳤는데 유홍준선생이 예찬한 삼십삼간당에대한 설명을 읽고 사진을 보니 마치 종묘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듯 자태가 장엄했다. 가복싶은 마음은 사진으로 대신한다.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읽은 답사기지만 유홍준선생이 미술사학자이다보니 역사학도인 내 입장에서는 늘 2%부족함을 느끼는데 역사도시인 이 교토의 무대에서는 좀더 심하게 느껴진다. 답사대상이 고미술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토는 고대는 물론 근현대까지 우리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런 역사적인 사건과 대상들이 너무 생략되었다.

 

아쉬운점은

 

광륭사의 미륵반가상을 소개하면서 이 목불이 20세기 초에 부분 변조되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점이다. 야스퍼스가 예찬을 했다는 사실만 부각시켰는데 연합뉴스 2009918일자에 이윤옥 외대교수가 주장한 글에 의하면 20세기 초에 이 불상의 얼굴이 일본인의 얼굴이 아니라는 이유로 얼굴과 손에 칼을대 부분수리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학자 나카이 신이치가 밝혀낸 사실이다. 또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광륭사 목조미륵반가상을 소개한 글에도 부분 변조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민족신문 2011118일자 도서소개 코너에 <신일본속의 한국문화답사기> 에도 광륭사 미륵이 성형수술을 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유홍준선생이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소개하지 않은 것인지 알수 없다. 아무튼 원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토는 근대에도 역사의 주 무대였는데 천황제 국가로 변모한 메이지유신 당시 이를 가능하게 이끈 풍운아 사카모도 료마의 조난지와 묘소가 교토에 있다. 막부말기 신선조의 본거지이고, 개화승 이동인을 교육시켜 조선에 보내고 한반도내 각지에 포교당을 설립했던 침략주의 사찰 동본원사가 교토에 있다.

그뿐인가 교토로 천도하고 백제인이 어머니 였다는 간무천황의 묘소가 있고 민비암살의 실질 최고 책임자이자 한일 강제병합의 주모자인 메이지천황의 무덤이 바로 후시미에 있다.

역사가의 답사라면 이런 사실이 반드시 언급되었을테지만 미술사가의 답사라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

p. 176에 공해의 초상을 모신 어영당을 御靈堂으로 인쇄했는데 御影堂의 잘못이고

p. 280에 범종의 높이는 22m가 아닌 2.2m 이다. 다음번 개정판에 오류가 바로잡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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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 빛은 한반도로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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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규슈

- 빛은 한반도로부터 -

유홍준 / 창비 / 357

 

 

일본정부관광국 통계에 의하면 2014년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수는 275만명이 넘는다. 올해 1월달에만 35만명으로 사상 최고수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일본을 찾는 외국인중 가장 많은 숫자다. 곧 중국인이 추월할테지만.

 

여행블로그를 찾아보면 일본을 찾는 한국관광객은 대부분이 먹을거리에 집중하고 있다. 단체여행은 관광지 중심, 개별여행은 먹을 것 중심이다. 일본이 원체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디저트도 발달해서 시골에조차 놀랄만한 맛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입이 매우 짧아 맛집에 관심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여행의 과정이 맛집이 다가 아닐텐데 어쩜 한결같이 맛집만 파고드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거년 일본여행에서는 역사문화를 중심으로 구경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명소구경에도 시간이 모자라 실패한적도 있다. 차가 없이는 불가능한 부분도 있고.

 

그래서 여행사를 하는 친구에게 역사문화 중심의 고품격여행을 시행해보라 권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인솔자에 따라 호오가 갈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싫어한다고 한다. 특히나 일본의 경우는 한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에 다 밝아야하고 문화적인 소양도 있어야하며 일본어까지 가능해야 하는데다 유머감각도 필요하니 그런 인솔자나 가이드가 얼마나 되겠는가. 곰곰 생각하니 일본어를 못하고 유머감각도 없지만 나머지는 내가 하면 되겠다 싶어 호기롭게 내가 할테니 모객하라 했더니 일어를 못해서 안된단다.

 

그러나 인솔자가 필요한 단체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관광지나 맛집 못지않게 일본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대한 관심이다. 그런 목적의식이 없다면 애초에 역사문화 관광은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한 사람이 유홍준이다. 해박한 지식과 인문학적 예술적 배경에 입담까지 갖추었으니. 그래서 목적의식을 가진 답사단이 항시 대기하고 있고 국내를 돌아보고선 이제 해외까지 활동반경을 넓혔다. 나도 답사단에 들어가고 싶다.

 

일본은 원체 한국과 깊게 얽히고 설킨 역사를 가진데다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화 풍토가 있어 한국인이 가장 가고싶어하는 외국이다. 잊을만 하면 되풀이되는 독도망언이나 위안부망언도 있고 근년에 쓰나미로 방사능오염의 걱정도 있었지만 많은 한국인이 일본을 찾는다. 그중에 역사나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방문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는 많을 것이라 믿는다. 이 주제와 관련된 답사기를 몇권 읽었고 나이가 지긋한 분들 중에는 요란한 관광지보다 풍광이나 유래를 따지는 조용한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는 1권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매우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가지고있던 신판 전질은 사정상 어디론가 가버리고 구판 1,2,3권만 책꽂이 한켠에 남아있다. 일본편은 벌써 3권이 모두 나왔는데 이제야 1권을 읽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일본속의 한국문화라는 식상한 소재를 유교수도 재탕하는가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일본의 고대사는 한국사와 분리해서는 전개될수 없으니 일본 고대문화에 한국의 흔적이 짙건 옅건 남아있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게다가 임진왜란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각종 기술과 문화재 역시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이 지워질수 없다. 그러나 신문이나 도서등 여러 매체에서 이를 다루는 지극히 민족적인 관점은 본말이 전도되어있다. ‘일본의 여러 문화는 한국에서 왔다’. 맞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일본이 한국을 공식적으로 형님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일제치하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잊을수 없어 그렇게라도 정신적 분풀이를 하려는 것인지 알수 없다. 독도문제나 위안부문제를 일본의 전부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일본에 극우파가 있지만 한편에는 한류팬도 있고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도 있다. 인터넷에 도배되듯 일본이 그리도 싫다면 일본여행을 못가게 하고 일본관광객도 못오게하고 일본제품을 쓰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게 가능한가? 고대에 일본에 문화를 전해주었다고 우쭐할 필요는 없다. 그럼 지금은 왜 이모양인지 답할수 없으니.

 

다행히도 이 답사기는 일본속의 한국문화를 찾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유교수의 문제의식은 그런 유아적 사고방식은 아니어서 일본에 도자기를 전해준 우리나라의 도자기수준이 한참 뒤떨어져 있음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한다.

답사경로는 북큐슈와 남큐슈로 나뉜다. 한반도 도래인이 가져온 청동기문화인 요시노가리 유적지, 임진왜란 전초기지인 히젠 나고야성, 무령왕과 고려불화가 있는 가라쓰, 조선도공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아리타와 이마리, 나가사키 데지마, 후쿠오카 다자이후 관아터와 텐만궁, 백제식 수성, 도공 박평의와 심당길의 자손이 살아있는 가고시마, 미야자키 남향촌의 백제마을, 가고시마 선암원과 상고집성관 등이다.

 

일본사에서 구석기시대는 연륜이 짧고,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게 조몬 문화인데 조몬토기는 시대도 매우 이른시기로 올라갈뿐더러 그 우수함에 놀란다고 한다. BC 300년에 조몬시대가 끝나고 청동기시대인 야요이문화가 시작되는데 이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곳이 요시노가리 유적지다. 이 청동기는 한국계로 한반도에서 들어온 것인데 일본인들은 꼭 청동기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들어왔다고 표현한다. 이를 매우 재미있는 예로 표현했다. ‘아버지가 용돈을 주셨는데 이를 아버지회사의 돈이 아버지를 거쳐 내게 들어왔다고 말하나어쨌든 중국의 청동기문화와 한반도 즉 고조선의 청동기문화는 확연히 다르다.

 

현해탄(玄海灘). 난 이말이 대한해협의 일본식 표현이라 써서는 안되는 용어인줄 알았다. 마치 독도를 죽도로 부르는 것처럼. 그런데 정작 일본에는 현해탄이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 사이 바다의 지리적 명칭은 대한해협, 세분하여 쓰시마섬을 기준으로 북쪽은 부산해협, 남쪽을 쓰시마해협으로 부른다. 그런데 가라쓰 앞바다에 현계도(玄界島)라는 섬이 있어 이 앞바다를 현계탄 즉 겐카이나다 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가라쓰에서 후쿠오카까지의 바다를 현해국정공원으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현해탄이라는 이름은 관부연락선이 다니면서 붙여진 이름이라니 불과 100여년 밖에 안된 이름이다. 그것도 한국사람이 만든 이름이다. 윤심덕이 자살한 바다고 임화가 노래한 바다다.

 

가라쓰, 아리타의 가마와 자기를 소개하면서는 일본속의 한국문화가 아니라 일본문화로 발전 성공했다는 표현을 하며 본고장 조선의 도자문화는 왜 오늘에 이르지 못했는지 반성하고 있다. 이런 반성은 뒤에 가서 다시 장인을 존중하라는 교훈으로 다시 소개된다. 일본에 잡혀간 수많은 도공들은 일본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1617년 쇄환사로 일본에 다녀온 이경직의 기록(부상록)을 인용하여, 조선인 포로를 데려오려 하였으나 돌아가기 원하는 자가 극히 적었다고 한다. 조선과는 달리 그만큼 대접받고 일을 했다는 뜻이다. 글중에 임난시 납치된 도공들은 모두 지방의 도공이라 광주요의 기능엔 이상이 없었을 거라고 썼는데 그렇지는 않다. 내가본 실록 기사에 의하면 임난이후 왕실에 공급할 자기를 구울 기술자를 찾지못해 이러다 영영 맥이 끊길까 염려된다는 내용이 있다. 잡혀갔든지, 실종되었든지, 도망갔든지 아니면 전란의 와중에 죽었든지다. 요는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도공 뿐아니라 기술자를 천대하는 분위기가 만연했으므로 굳이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고 기술자 내부적으로도 죽기 직전에야 제자에 전수한다는 며느리도 몰라식 비밀주의가 기술의 전수 이전 발전을 가로막았을 뿐이다.

 

그 외에 백제 멸망시에 왜에서 근3만의 군대를 보내 백제를 도왔던 부분을 설명하며 한국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왜까지 5국시대로 불러야한다는 주장은 참으로 음미할 가치가 있다. 현재 기준으로 국가와 민족을 따질수 없기 때문이다.

 

항상 감칠맛나는 문장에 박학다식이 넘쳐나는 글이지만 가끔의 실수가 옥의 티로 남는다.

p.33에 한반도에서는 이미 기원전 1000년부터 청동기시대에 들어가......

이 부분은 고교 한국사교과서에 기원전 2000~1500년 만주와 한반도에서 청동기가 시작되었다고 써있다.

p.135 저자는 일본의 천황이라는 이름은 그나라의 고유명사일 뿐이므로 굳이 일왕으로 격하시킬 필요없다고 했는데 도산신사를 설명하는 글에서 응신천황을 오진왕이라고 두 번이나 표현하는 실수를 범했다.

p. 350 상허선생 말씀중 흥어시 입어예 성어악의한자표기를 입어예(立於藝)라 했는데 입어례(立於禮)의 잘못이다. 잘못 알고있을리는 없으니 잠시 혼동했나보다.

 

2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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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임진왜란 1 -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이순신역사연구회 엮음 / 비봉출판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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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은 누구나 아는 임진왜란, 

1592년 왜의 대군이 동래 부산을 기습공격하면서 7년간 이어진 전쟁이다.

상처뿐인 승리기는 하지만 임진왜란의 승리는 전적으로 수군의 활약 덕분이다.

수군의 대승이 아니었다면 현재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군의 승리를 이끈 인물은 단연 이순신. 

막연하게만 알고있는 인물이다. 

 

성웅취급을 하고 이전 정권에서 지나치게 미화하다보니 반발심리를 가진 사람도 있다.

어느 아마추어의 역사책에서였던가 이순신의 해전 전승은, 그가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해서

그렇다고 전공을 폄훼한 글도 봤다.

그러나 이순신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서 "이순신역사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사비를 들여 이순신해전연구에 나섰다.

적지않은 연구성과가 나온것 같은데 이 책은 그 중 성과를 집대성한 시리즈중 첫째 권이다.

부제는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여러명이 함께 만들어서 그런지 서술체계는 일관성이 부족하다.

다들 생업이 있고 남는시간을 쪼개 투자한 것이라 전담 연구자가 없어서

일원화 작업이 안된듯 하다. 다큐멘터리형식으로 진행되지만 중간중간에 드라마처럼 대화체와 감성이 녹아있는 서술이 등장하고

소설처럼 1인칭 시점도 나온다. 해설과 소설과 서사가 한편에 다 들어있다.

학자가 아닌 민간직업인들이 모여 수년간 이러한 성과를 냈다는 점이 놀랍고 존경스럽다.

책을 보면

경상우수사 원균이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에게 직접 출병을 요청했다는 항간의 풍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조선의 군사정책과 명령체계상

우수사 → 감사 → 조정 → 감사 → 좌수사로 이어지는 계통이 엄연히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자들은 실록기사에 의거해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쟁이 시작되자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모든

배를 파괴하고

무기를 바다에 버린후 수군을 해산하고 도피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4월 30일의 첫 출동시 원균의 우수영에는 함대와 물자, 병력이 하나도 없었고

동시출병을 약속했던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아무 소식이 없었기 때문에 단독 출전했는데

두렵고 외로운 마음으로 홀로 적을 상대하러 나가는 이순신의 마음을 엿볼수 있는 서술이다.

저자들은 이순신 해전에 나타난 몇가지 전술을 종합하여 이순신해전의 특징으로 삼았다.

우선 이순신전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백병전이 없는 순수 타격전이라는 것이다. 이를위해

거북선과 학익진이 개발된 것이라 한다.

이순신해전에서 백병전이 나타난다는 것은 대표적인 오역이거나 오해라고 한다.

둘째는 거북선의 구조와 용도에 대한 것이다.

거북선은 2차 출병시에 처음 등장하는데 정조때 왕명으로 조사하여 제작한 그림에 의하면

구조는 3층이고 용도는 충격 돌파용이다.

셋째 충분한 정보망인데, 이를 위해 24시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넷째는 철저한 논공행상이다. 이순신은 기존방식대로 적의 수급을 벤 숫자로 공을 따지지

않았다.

자체적인 평가기준을 만들어 열심히 전투에 임한 군사를 우선으로 했다.

때문에 이순신함대는 왜적을 사살하고 배를 깨뜨리는데 힘썼지

전투후에라도 적의 머리를 베는 일에 집착하지 않았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가 끝난후에 나타나 열심히 적의 머리를 베어 조정에 바치고

이순신보다 수급을 많이 메었다고 주장하는 원균 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처사다.

마지막으로 학익진 전법을 든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중시하는 내용이 아닌가 한다. 왜적의 함대를 만나면 크게 반원형을

만들어 적선단을 포위하고

대포와 큰 화살을 사용해서 적함을 무력화시키는 전술인데 이를 일시집중타라고 부른다.

배를 가까이 대거나 부딛쳐서 상대의 배에 올라타 병장기를 이용해 백병전을 벌이는 왜군의

전술은 애초부터 통하지 않았다.

조총 대 대포라는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전함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라 제자리에서 좌우회전이 가능했기에 좌현과 우현을

바꿔 돌려가며 쏘아대는 집중포화가

승리의 비결이었던 셈이다.

이책은 1권이라 안골포해전까지의 내용만을 담고있다.

자원봉사 민간연구자들이 만들어낸 역저긴하지만 책의 말미에서 주장하듯 근대 일본해군이나 

 영국등 2차대전 연합국에서도 이순신 해전을

모방하고 참고했다면 좀더 확실한 증거자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이순신의 경영經營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대강 짐작하겠는데 매번 경經과 영營을 따로 구별해 "경·영" 이라 표기할때는

먼저 경과 영이 각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저자들의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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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찾은 고조선
이종호 지음 / 글로연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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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찾은 고조선

이종호

글로연 424

 

민족의 뿌리나 시원을 찾는 과정은 개인이 자신의 조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역사학의 기능이나 효용을 따지기에 앞서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다. 그런점에서 우리역사의 근원을 밝히는 일은 학문적 가치를 넘어서는 의무라고 볼 수 있다. 그간 역사학도로서 우리역사의 시작점인 단군조선에 관한 제연구와 여러 가지 민간학설들을 보면서 느낀점은 황당무계(荒唐無稽) 그 자체였다. 고고학상의 청동기시대를 훌쩍 뛰어넘은 시기에 국가를 그것도 대영역의 판도를 자랑하는 거대문화권이라니. 그러나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기록을 꾸준히 보아오면서 그간의 관점에 자연스레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알고있는 것은 아닐까. 일제시기의 왜곡된 역사관에 너무 젖어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속칭 환빠는 아니지만 단군조선 즉 고조선의 실체에 대해 어느정도 인정할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기존의 내 생각에 크게 수정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이책은 시중에 많은 여느 고조선에 대한 책이 그렇듯 정통 역사가에 의한 것이 아닌 아마추어 역사가의 저작이다. 그러니 신빙성에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그동안의 단군관련 사료와 함께 최근의 고고학 연구성과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내용까지 함께 서술된 꽤 볼만한 저작으로 평가한다. 우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던 고조선의 실체를 역으로 중국측 자료를 내세워 반증한 치밀한 구성이 눈에 띈다. 저자인 이종호는 전혀 모르던 사람이다. 이종호라는 이름이 너무 흔해 이사람이 그사람인가 혼동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이종호교수부터 조선시대를 다룬 이종호도 있고 고대를 다룬 이종호도 있는데 책의 소개에 의하면 이 이종호씨는 프랑스에서 공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박사고 현재 카이스트 초빙과학자로 있다고 한다.

 

고조선에 대한 사료는 너무 빈약하고 그나마 삼국유사에 있는 서술은 고조선 건국으로부터 치면 무려 삼천년도 더 뒤에 쓰인 후대의 기록이다. 비단 고조선 뿐만 아니라 우리 고대사 자료가 거의 대부분 중국측 사료에 있는 내용이다. 역사가들은 일단 중국측 사료를 믿을 만 하다고 보고 그에 의거해 우리 고대사를 서술해오고 있다. 이를 보조할수 있는 방법이 고고학인데 고고학자들은 역사학자와 달리 유물 유적으로만 시대를 구성하기 때문에 개연성이나 상상력으로 역사를 복원하지 않는다. 바로 그게 가장 큰 문제점이다. 고고학은 역사학의 보조학문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고고학이 고대사의 원류처럼 자리잡고 있고 그 고고학은 일제때부터 내려온 학문적 전통과 사승관계가 뿌리깊게 박혀있다.

 

사실 국가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비정치적이고 비민족적일수는 없다. 어떤 학문이든 마찬가지다. 학문에 국경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에 가깝다. 그러나 21세기에 우리나라가 2천년의 역사를 가졌든 5천년의 역사를 가졌든 그리 크게 의미가 있는 일도 아니다. 어차피 중일 사이에 낀 약소국이고 근대학문이 시작되면서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너무 큰 영향력아래 있어왔기 때문에 민족적 자존심은 있을지언정 민족적 자존감은 매우 미미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5천년의 문화전통과 방대한 영역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사실이 현재의 정치사회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일본이나 중국을 뛰어넘을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살이에 쓸데없는 학문으로 취급받는 인문학이라 취직도 안되는 마당에 단군이 5천년전 사람이든 일만년전 사람이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학자의 본분은 진실과 사실의 규명이고 특히나 역사학은 근원을 복원하는데 의미를 두고있기 때문에 실생활에 대한 효용여부를 따지는 천박한 분위기가 지나면 언젠가는 지나간 역사를 중시하는 시대가 오리라 믿는다. 보석이라는게 생활에 요긴해서 가치가 있는게 아니듯, 사랑이 내 몸값을 높여주기 때문에 의미있는게 아니듯, 인간은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이기에.

 

현재 우리나라의 역사 또는 역사학은 정치권에서 좌우의 투쟁에 이용되고 그 투쟁에 별 도움이 안되는 고대사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그러다가 중일의 고대사 협공에 직면해서 정부는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단체를 출범시켰는데 이 구성원이 문제되고 있는 얘기를 들었다. 제대로된 상황이라면 국사편찬위원회와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적극적으로 고대사를 해결해야한다. 학계가 누구누구의 제자로 연결된 도제시스템에 꽉 막혀있는 상태에서 아마추어 역사애호가들이 나서서 될 문제가 아니다. 실리이만이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기 전까지 트로이전쟁은 오랫동안 신화에 불과했다. 우리 고고학계와 역사학계도 열린 마음으로 연구를 수행할 날이 곧 오기를 바란다.

 

 

책의 내용은 중국의 동북공정 소개로부터 시작한다. 고대사가 단순히 학자들의 책상앞 연구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데 있다. 어쨌든 동북공정은 우리나라 역사를 빼앗아 간다는 뜻이 아니고 중국이 현재의 중국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현재 중국 영토에 있는 지역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로 해석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를위해 중국은 기존에 가져왔던 중국역사의 시조로 황제(黃帝)뿐만 아니라 치우까지 추가했고 중국학자들이 중원의 역사전개가 아니라 동북지역 부족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본 상(:)나라 역사도 중국의 조상이고 역사라 했다. 또 중국 청동기문명의 출발지인 중원 앙소문화 외에 최근에 발견된 내몽골 홍산 우하량문화 역시 중원의 문화와 연결시키고 우리와 관계 깊은 하가점 하층문화 역시 중원의 역사로 편입시켰다. 그래서 현재 중국은 중국인의 시조로 황제 염제 치우 세사람을 들어 이를 삼조라하고 삼조묘를 건립하여 전설을 역사로 만들고 그야말로 새역사를 쓰고 있다. 자기네 조상은 황제고 치우는 오랑캐족이라고 하던 주장을 단숨에 바꿔 이제는 자기조상이라고 하니 옛말에 환부역조(換父易祖)가 바로 이 경우다.

우리역사에서 청동기시대는 기존에 기원전 10세기부터라고 했는데 현재 국사교과서에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써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이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최근에 발견되는 고대유물유적에서 연이어 기원전 1500년에서 2000년의 흔적이 나타나도 여전하다. 아직 본격화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고고학자들의 신중한 견해가 한편 수긍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다. 예를들면 지금부터 1만년후 핵전쟁이나 지구적 재앙으로 인류가 멸망단계를 거치고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가정할 때 고고학자라면, ‘한국인은 서기 2015년 당시까지도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남아있는 컴퓨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흔적들을 조합해 누가, ‘당시 한국인은 높은 수준의 ICT기술을 갖고있었다고 발표하면, ‘전혀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한국에는 2015년 무렵 초보적인 컴퓨터기술을 갖고있었거나 미국이나 일본에서 가져온 장치였을 것이다.’ 라고 주장할 것이다. 뭐 이해는 간다. 그러고보면 역사가는 경찰이나 검사같고 고고학자는 판사같기도 하다.

 

하여튼 근년에 내몽골 홍산 조양,적봉에서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7000년경까지 올라가는 신석기유적으로 밝혀졌다. 이곳은 요하지역으로 이를 요하문화 또는 홍산문화라 부른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하가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청동기유물이 발견되었다. 시기적 구분이 있어 하층문화와 상층문화로 나뉘는데 동북아시아 최초의 청동기유적이라는 하가점하층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2200년으로 나온다. 요동요서를 포함한 요하지역은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오랑캐로 부르던 곳이고 우리역사 특히 단군조선과 관계 깊은 곳이다. 홍산지역에서 발견된 제단과 신석기유물은 연대가 기원전 3500년 이상으로 나오는데 곰형태의 용과 여신상, 옥기 그리고 적석총, 빗살무늬토기, 곰조형물이 발견되었다. 곰이야 동북아지역의 대표적인 토템이라고 하지만 빗살무늬토기와 적석묘제는 중국과 관계없는 한국형 유물이다. 이를 고조선과 관계없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제단유적이 기원전 4000년까지 올라가지만 저자는 이것이 단군조선은 아니라고 한다. 인근의 하가점하층문화가 청동기시대로 우리 고조선과 관련있다고 한다. 어째서?

 

국사교과서를 보면 우리 고대문화의 특징으로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을 드는데 평남성천군백원리 고인돌유적에서 발견된 세형동검의 연대측정 결과는 3400년전 즉 BC 14세기라고 한다. 기존 학자들의 주장으로는 비파형동검문화가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이 BC 12세기정도라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절대 BC 10세기 이상으로 올라갈수 없다는 것인데 비파형동검보다 후기에 제작된 세형동검의 연대가 그보다 훨씬 상회한 것이다. 다른곳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의 연대는 훨씬 높이 올라간다. 한국식 동검은 중국식과 달리 일체형이 아니라 조립형이고 구리 주석 납의 비율이 일정하다고 한다. 하가점하층유적에서는 적석총과 제단과 함께 성터가 발굴되었는데 고구려산성의 독특한 특징인 치(돌출석축)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청동기 역시 기원전 1500년경의 유물이라 한다.

 

요녕의 고대문화가 곧 우리조상이며 단군조선의 시원이라 말할수 있는 직접증거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중국과 관계없는 민족이고 문화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가 이제껏 단군을 신화로만 주장한 탓에 지금은 중국이 이들 동이족의 문화가 동북아최초이며 나아가 동이족 역시 중국사의 일원이라고 못박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하상주단대공정,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이다.

우리 고대문화의 특징인 빗살무늬토기와 고인돌,적석묘,비파형동검문화가 겹치는 곳이라면 우리문화라고 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 더구나 고조선이 있었다고 생각되던 곳에 고고학적 연대가 일치하는 유물유적이 있다면 이를 고조선과 연결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연구과정일 것이다. 이 책의 문제제기는 너무나 당연하다. 저자는 소개한 내용 이외에도 중국이 제시한 증거를 역으로 활용하여 동북지역의 고대문명을 조명하고 고조선과의 동일성을 유추하고 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연구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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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오래된 상점을 여행하다 - 소세키의 당고집부터 백 년 된 여관까지
여지영.이진숙 지음 / 한빛라이프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도쿄의 오래된 상점을 여행하다
여지영. 이진숙.  글 그림
한빛라이프 / 336

 


오래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늘 새것만 추구하는  시대에 오래된 것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오히려 오래되었기에 가치가 있는 것일까. ‘오래될수록 좋은 것은 친구와 포도주 밖에 없다’는 서양속담이 떠오른다.  그러나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것만으로 주목받기는 어렵다. 평균적 기대치 이상으로 시간이 흘렀을 때 누군가의 관심을 받을수 있다. 산이나 바위가 오랜 것이라고 우러러보지 않지만 집이 천년쯤 되었다면 단박에 관심을 끌 수 있다. 인위적인 것은 시한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 이책은 그저그런 여행기나 여행안내서가 아니다. 일본의 문화에 대한 것이고 그 문화의 내력을 이웃나라 여행자의 눈으로 본 책이다. 비슷한 환경의 한국과 일본인데 우리는 세계에 유례를 찾을수 없을 정도로 빠른 변화와 속도를 자랑하는 디지털 민족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변화와 발전을 경험한 일본은 우리에겐 없는 그 어떤 요소가 있다. 그것이 DNA인지 역사적 유산인지는 좀더 따져봐야겠지만 일본에는 분명 개성을 지키려는 오래된 노력들이 존재해왔다. 현재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세계 최고령 기업은 오사카의 시텐노건설인데 무려 14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곧 백제의 장인이 시텐노지를 건축하고 그 자리에 남아 사찰보수와 건축을 가업으로 삼았던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일본에는 오래된 건축물이나 문화유산도 많이 남아있는데, 외형적인 것은 우리와 달리 외침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라 이해할수 있지만  수백년된 기업, 가게가 지속되는 것은 분명 한국과 다른 어떤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 만의 밈(meme)일까.


이책은 왜 다른가를 따지는 책이 아니다.
우연찮게 한일문화를 다룬 책을 연속으로 읽게 되었는데, 지난번에 읽은 <당신들의 일본>(유순하)을 보면 일본의 장점과 단점, 한국의 장점과 단점이 신랄하게 비교되어 있다. 멋도 모르면서 일본을 비하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저력을 키우자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의 일본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서두에 독자를 위해 간략한 일본 약사(略史)를 소개해주고 오래된 가업이 어떻게 지금껏 손님을 맞고 있는지 외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뿐이다. 그러니 이 책은 한편 여행자를 위한 독특한 일본의 풍물 풍습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분석이 아니라 묘사인 셈이다. 구경을 가든 맛보러 가든 역사를 파헤치려 가든 그건 탐방객의 자유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 소개된 가게들이 현재 그 자리에서 여전히 여전히 손님을 맞고있다는 사실. 평론가가 아니라 관객의 눈으로 본 일본의 무대다.


거창하게 일본의 삼대 경영의 신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그냥 소시민들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이 왜 일본에는 있는지 따지는 것은 매의 눈을 가진 연구자의 입장이고 탐방객은 그저 소개된 가게들의 맛과 멋을 음미하면 된다. 사람사는 세상은 다르면서도 비슷하므로. 그렇게 선입견없이 일본내 오래된 상점들을 구경하면서 여행을 다녀보자. 여지껏 알지 못했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일본의 속살을 흥미있게 볼수 있다.


인간의 기본욕구인 식욕과 소유욕을 자극하고 해결해주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을 경험할수 있다. 흥망과 과정이 들어있고 의욕과 도전을 볼수 있으니 이 책은 한낱 맛집탐방기 따위가 아닌 충실한 일본문화 소개서다. 원인을 따지기에 앞서 현상과 실제를 보는 정확한 눈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내가 이 책에 대한 소개글을 보고 흥미를 느꼈던 대목은 300년된 이쑤시개 가게였다. 300년된 이쑤시개 전문점이라니!!! 우리나라에는 300년된 기업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양산업이 된 동네빵집의 폐업홍수에 휩쓸려 홍대앞 리치몬드제과점이 없어졌다고 인터넷을 달군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쑤시개 전문점 사루야는 1704년 창업하여 지금의 그 자리에서 그대로 8대째 가업을 이으며 성업중이다. 나는 이쑤시개를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우리집은 물론 어느집이나 이쑤시개는 있다. 중국집 광고용 증정품이나, 필요하면 마트에서 파는 대용량 이쑤시개 따위가 가정마다 존재한다. 굳이 이를 쑤시지 않더라도 과일이나 떡을 찍어먹을 때 요긴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이쑤시개를 썼을까. 지금은 전량 수입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루야의 이쑤시개는 치아용과 화과자용으로 나뉘고 크기와 모양도 다르다. 버드나무 일종인 쿠로모지로 만들고 당연히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정성들여 세공한다. 고급음식점에서 품격있는 마무리용으로 주문하고 선물용으로도 많이 판매된다고 한다. 전통과 장인의 정성이 사양산업도 주식회사로 바꿔 당당히 살아남아 이름을 날리게 한는 것이다. 나무향이 감도는 사루야의 이쑤시개.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것들이 없을까.


문방사우를 파는 유벤도. 이곳도 100년이 넘었다. 그런데 서예경력 10년의 직원이 한국에서도 붓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은 좀 믿기 어렵다. 붓과 먹은 당연히 중국이 먼저고 질도 좋았겠지만 붓과 먹, 종이는 고려 조선의 대중 수출품이었고 대일 통신사행에서도 소문난 특제품이었다.

 

닌교초의 두부상점 후타바는 1924년 개업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부 전문점이 90년이나 지속되었다는 사실 역시 감탄할만 하다. 그러나 일본두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조금 미흡하다. 두부는 중국에서 한대 회남왕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 중국에서 두부가 대중화된 것은 당나라때로 보고 있다. 두부는 당시의 백제와 신라에 들어왔을 것이고 삼국시대 활발한 교류를 가졌던 일본에도 자연히 전파되었을 것이다. 1183년 나라의 신사에 두부를 받은 기록이 있다는 것은 이를 짐작케한다. 그러나 일본에 두부가 대중화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임진왜란 이후다. 도자기, 차, 성리학 등과 함께 조선의 두부가 일본에 전해져 오늘의 일본두부를 있게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두부는 본고장 명나라의 황제조차 감탄할 정도로 맛과 풍미가 뛰어난 대중음식이었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중 두부제조법을 아는 백성들의 손에 의해 일본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도자기든 두부든 인쇄술이든, 원조가 틀림없는 한국이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조선은 기술자를 푸대접하는 사회였고 일본은 반대로 기술을 존중해주는 나라였다. 도자기나 두부가 일본에 전해져 한층 발전하고 정교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청출어람이라는 용어 정도로 덮을수 없는 그 이상의 열정과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결과다. 받아들이고 배워서 발전시키고 일본화시키는 일본의 저력이다. 조선과 달리 기술자들은 일본에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책의 본질에서 벗어난 서술이 길었는데 자기가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하려는 완벽주의가 오늘의 일본을 만든 요인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 여러 과정과 결과가 수십 수백년 지속하는 가게를 낳게한 것이고 오늘날에는 하나의 문화상품 역할도 하고있는 것이다.

 

책은 도쿄를 15개 권역으로 나누어 각각 해당 거리의 특징을 약술하고 그 거리의 명물 상점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각 장의 말미에는 지역의 소문난 상점들을 간략하게 첨부해두었다. 100년 수십년된 점포가 수두룩하다. 또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상점의 위치와 전화, 가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표시하기도 했다.


각 장의 배경이나 업종에 대한 설명에서는 저자들의 내공과 필력이 대단함을 느낄수 있다. 역사서나 인문서를 써도 충분히 통할수 있는 실력이다. 다른 분야의 좋은 내용을 기대해본다.   

 

마지막으로 느낀점은 이런 가게의 모습이 단지 도쿄만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일본 전역으로 넓히면 더 오래된 전통의 가업을 잇는 모습을 알마든지 볼수 있을 것이다. 부러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인기직종이 아니라서 더 이상 가업을 승계하겠다는 젊은이가 없는 상점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와도 비슷한 경우라 인지상정이로구나 생각케 한다.  흡족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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